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왕하 14:4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편 58:11
다들 저마다 산당을 어쩌지 못하고 산다. 기어이 제거하지 못함으로 그것으로 무마하고 위로를 얻으려 한다. 그간 집을 한 채 빚을 끌어다 가졌고 올 초에는 부친이 사망하였다. 모진 세월을 견디기는 그 자식들도 마찬가지여서 큰 아들은 이혼하여 병든 몸으로 늙은 어머니에게 치대고 살고 있고 밑에 큰딸아이는 미혼모로 처음 남자는 알코올중독자요, 다음에도 늘 남자가 끊이지 않아 지금도 ‘오빠’라는 이와 무보증에 월 30짜리 어디 원룸에서 산다며 헛헛해하였다. 자신의 딸아이는 괜찮다고 하지만 한 달에 한두 번 외출을 할까? 저가 늘 같이 24시간 붙어 있으면서도 좋아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동안 연락이 없었구나? 나는 저와 저의 가족의 구구한 인생살이를 듣다가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 16:31).” 답이 없다는 저의 말에 답을 일러주었다. 한참 떠벌이고 다른 말은 다 들으면서도 정작 교회 나가라, 예배에 와라, 할 때는 묵묵부답이었다.
저마다의 산당이 그 뱃속이라.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욥 20:14).” 마치 남의 말 하듯 다 그렇지 뭐, 하며 괜찮은 척 구는 모양이 답답하였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그러니 정작 그 영혼에 대해 말하면 듣기 싫어한다. 그저 사는 이야기, 아이의 어떤 상태, 앞으로의 생각 등으로 스스로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두어 시간을 통화하면서 나는 진이 빠졌다. 했던 말 또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자신을 변명하고 두둔하고 외면하면서도 한사코 그 산당만은 제거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 마침은 멸망이다. 나는 단호히 말하였다. 그리 살다 그리 죽은 아버지의 비참한 인생을 보고도 그러냐?
저의 신은 배다. 그 영광은 그의 부끄러움이다. 땅의 일을 생각한다. 그저 기를 쓰고 집 한 칸을 갖기 위해 억척스럽게 살았고, 사느라 딸아이가 양극성성격장애를 앓고 있는 데도 괜찮다고 하며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군다. 곧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그 영광이란 게 부끄러움이란 것을 본인만 모른다. 이생의 자랑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듣기 싫으니 그저 ‘문득’ 카톡을 보다가 쌤이 생각나서 연락한 거지 상담하려고 한 거 아니라면서 볼멘소릴 하였다. 아무 일 없으니 괜찮다는 식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저 그들의 영광이 부끄러운 것이라.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결국 땅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온통 그리 쏠려 있는 정신이다. 기우다. 경향이고 습관이고 중심이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해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자신의 생각과 어울리지 않으면 버려버린다. 생각이 자꾸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다는 소리가 감사하다, 믿는다, 교회를 나가지는 않지만! 하고 항변하듯 헛소릴 해대는 것이다. 그저 그 생각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간다. 마음이 있는 곳에 자기중심도 있다. 보물이 거기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원수 되는 생각뿐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차마 저의 말을 일일이 다 서술할 수도 없다. 예수 없이 사는 삶이라는 게 얼마나 비참하고 처량한지, 그 부모의 때가 그러했고 그 자식들의 때가 그러한 것을 정작 본인들만 모른다.
부친 사망 때 왜 연락을 안 했나, 하고 물으니 자신은 굳이 장례도 치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언니도 얼굴 한 번 삐쭉 내밀고 발인 때도 오지 않았고, 뭐 보여줄 게 있어야 연락을 하지! 하면서 허탈해하였다. 참으로 기가 막힌 소리다. 그런 생을 지금 네가 살고 있다! 그저 이 땅에 사는 것으로 전부라면 네 말마따나 뭐 그리 기를 쓰고 악착같이 사냐? 딸애가 그러고 있든 말든 오늘 하루도 서로 괜찮았다 하면서 그것으로 감사한다고 하니 뭐라 더 할 말이 있겠냐? 나는 그렇게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야단을 쳤다. 속된 말로 ‘콩가루 집안’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도 괜찮다고 한다. 예전에 자신이 전도하여 그 친구들이 교회를 나왔고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던 것인데, 다들 이제는 저마다의 산당을 고집하며 그것만은 제거할 수 없다고 이고 지고 사는 꼬락서니들이니!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러라고 너와 나를 이 땅에 살게 하신 게 아니다. 곧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나는 저에게 이르고 꾸짖고 어르고 달래듯 호소하였다. 그럴 때마다 시어머니 앞으로 집 한 채 해드리고 자신들 건물 하나 가졌고, 빚으로 넘어갈 친정집을 끌어올 수 있는 능력껏 끌어다 수리하고 전세를 주어, 이만하면 열심히 살았지 않냐? 억울하다는 듯 하소연하였다. 아, 그러니 아이가 이제 더는 자해를 하지 않는다며 그것으로 됐다고 하는데 그러느라 한 달 내내 집구석에 처박혀 밖을 나가지 않는데도 정상이라고 우겨대는 꼴이라.
이러 저렇게 해서 아이를 글방에 보내면 안 되겠냐고 하는데, 암담할 뿐이다. 나는 도대체 저의 감사가 어떤 걸 두고 감사하다고 하는지, 하나님을 그래도 믿는다고 하는데 그 믿음이란 게 어떤 걸 말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원수된 것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그것이 자기 배를 배불리며 스스로 신이 되었고, 그 영광이라는 게 그저 부끄러운 것도 모르는 부끄러움뿐이고, 온통 그 생각이 땅의 일에 사로잡혀 뭐라 해도 들리지가 않는 것이다. 실컷 떠들다가도 복음만큼은 듣기 싫은 것이다. 오죽하니 난 저에게 듣기 싫어도 나와 말하려면 나는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딱 잘라 말했다. 그게 아니면 더 나은 심리학자를 찾아보든, 정신과로 문의를 하든, 나와의 이야기에서 영적인(?) 하나님 이야기를 빼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서는 가망이 없다. 다 좋다, 괜찮다, 나름 자신도 믿고 감사하며 산다는 저에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내가 일러줄 수 있는 말이 그것이 전부였다. 아이가 오게 될지, 저 자신이 예배에 나오게 될지, 나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이 새삼 연락하게 하신 데 따른 우리의 말과 말들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늦은 시간에 돌아와 가정예배를 드리며 기도하였다. 무기력과 무력감에 빠져서 손목을 긋지도 못하는 딸애를 두고 다행이라 여기며, 여전히 돈돈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저희를 위해,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 58: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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