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왕궁을 다스리며 그 땅의 백성을 치리하였더라
왕하 15:5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편 59:17
아사랴는 그의 교만이 제사장직까지 대신 수행하려다 나병에 걸려 죽었다. 우리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하는 기회가 된다. 모든 문제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 나는 저에게 확신하여 말해주었다. 때론 이해하기 어려워도 설령 억울하고 분하다 해도, 그래서 우리는 주의 심판을 바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형사재판을 생각하며 무죄방면이나 사면을 고려하고, 유대인들은 민사재판을 생각하며 손해배상이나 승소를 생각한다.’ <시편 사색>에서 C. S. 루이스의 탁월한 표현에 나는 동의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시 35:23).” 예수님도 한 가난한 여인의 억울함을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있다(눅 18:1-5). 이는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하신 것이다(1).
토요일에 오기로 한 저는 저의 표현대로 상쾌하게 일어나 준비하고 인천으로 왔다. 같이 점심을 먹고 오랜 이야기를 하며 성경 전반에 대한 이야기와 교회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살아온 날에 대하여 우리는 주께 아뢸 때 이를 민사사건으로 고하다 결국은 형사사건으로 마무리 되는 것에 놀란다. 실제 ‘가난’이란 엄연한 복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자’란 그만큼 부요한 마음으로 굳이 하나님을 바라지 않는다. 그 심령에 갈급함이 있었으므로 기꺼이 인천까지 오고 그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을 터, 그의 안에는 천국이 있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이를 누가는 보다 심층적으로 풀어놓았다(눅 6:20-24). 가난이 어찌 천국을 소유할까? 곧 우리의 주림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욕먹을 때 도리어 기쁨이 보장된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3).”
난 저에게 우리의 날이 이 땅에서 전부가 아님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곧 저의 장애와 고아와 서글픈 삶의 곳곳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더욱 사모하게 하는 간절함을 가진 게 복이었다. 실제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자들이 허다하여서,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24).” 스스로 위로를 구하고 찾고 그 위로로 삼은 것으로 부요함을 얻어 굳이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구할 게 없다. 그런 심령은 천국을 누릴 수 없다. 곧 ‘내가 좀 낫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 영혼은 악마의 지배를 받는다.’ 나는 루이스의 말에 찬성한다. 천국이 저의 것이라 하면 구원을 받았다는 소리고 예수가 그의 심령에서 자라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
저의 신앙이 고단한 까닭은 너무 많은 ‘그래야 하는 것’으로 자유함이 없어서였다. 헌금을 ‘해야 하고’, 기도를 ‘해야 하고’, 목사님을 ‘잘 섬겨야 하고’ 하는 식으로 온통 그래야 하는 것으로 인해 정작 안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이 저의 기쁨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아무도 없는 성전에 혼자 앉아 오전예배가 끝나고 오후예배가 있기까지 세 시간을 꼬박 기다렸고 수요예배, 금요예배, 성경공부까지 강요당하는 신앙으로 그 심령이 지쳐 있었다. 전에 다니던 이단 교회 여전도사는 여전히 이틀이 멀다하고 들이닥쳤다. 어려서부터 그와 같은 강요와 억압에 의해 믿음이란 걸 강요당했던 것이라, 그래야 하고 안 그러면 큰일 날 것처럼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저에게 그런 거 아니라는 데 한참을 더 말해주어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7).”
단지 이 땅에서의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저울질되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형편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나? 신제로 돈이 없다는 것, 가난하고 병들고 고아로 산다는 것이 우리로 얼마나 유익한가, 하는 것에 우리는 한참동안 초점을 맞추었다. 현실은 그대로고 짊어진 여러 고통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해도 이미 우리 안에 더해지는 나라가 있었으니, 저는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고백하였고 교회를 나가고 주를 바라는 마음이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부자는 실제 누릴 수 없는 기쁨이다. 알 수 없는 마음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4).” 곧 우리의 가난은 그러므로 주의 공정한 재판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갈급함이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시 67:4).”
곧 다들 심판을 두려워하나 우리는 심판을 기다리며 즐거워한다. 기쁘고 즐겁게 노래하며 공평히 심판하실 그 날을 사모한다. 이는 주께서 가지고 계실 증거들이 확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93:5).” 저의 억울한 마음과 살아온 날들에 대한 서러움과 켜켜이 쌓인 고단함에 대하여 주께서는 반드시 공정하게 다루어주실 것이다. 곧 우리로서는 주의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 두려워 떨 것이 아닌 것이다. 고소장이 접수 되었고 이를 재판장이 받아들이셨으며, 그렇다면 반드시 승소할 싸움이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35:24).”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여인이 재판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의 날은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날이 아니다.
저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곧 우리의 가난함은 주의 복이라. 실제 그것으로 더욱 주를 사모한다. 솔직히 마음을 비운다는 것, 심령이 가난하다는 게 우리 맘대로 되는 일인가?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그러려고 해도 절대 그럴 수 없는 마음으로 신음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돈이 더 있었으면 하고 곁의 사람에게 좀 더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고, 그럴 수 없는 자신에 대하여 더욱 무서울 정도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중무장을 하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우리 안의 싸움은 치열하기만 하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 결국은 우리의 몽매한 육신으로 인한 것이고 내 안에 채워도 채워도 다 채울 수 없는 허기지는 열등감으로 인한 것이 아니던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저의 질문에 나는 단호히 말해주었다. 그것까지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지. 난 할 수 없으니 대신 해주시길 바라며, 그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증거다. 가령 곁의 한 태국 여인에게 계속 마음이 간다. 잘해주고 싶고 자꾸 신경 쓰이는데 실제는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 어쩐다? 주의 마음으로 저를 대할 수 있게 기도하자. 하나님으로 인해 저를 사랑하고 위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자. 단지 저를 그냥 여성으로 보고 바라는 정도가 아니라 그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특별히 네 곁에 앉아 일하게 하신 동료라면,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을 가지고 같이 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게 사역이다. 목사만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말이 그렇지 그게 어디 쉬운가? 어려우니까 우리는 점점 더 가난한 심령으로 주께 의뢰하는 것이다. 주만 바라는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게 저이 또한 어디 교회를 다닌다고 하니 같은 성도로서 그 마음을 달라고 구하여보자. 그리 일렀다.
이에 말씀보다 앞서는 모든 마음이 악이다. 내 문제, 내 고통, 내 돈, 내 집, 내 아이, 내 우울감이나 내 몸의 고통, 이 모든 문제 앞의 내가 문제였다. 실은 그것이 내 문제가 아니라 주의 문제다. 주의 고통이고 주의 몸이며 주님의 아이들이고 주가 허락하신 우울감이다. 그리 알 때 우리의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대하 14:11).” 하는 아사의 기도가 내 것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어찌해보겠다는 게 부요한 마음이고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에 거할 수 없다. 억울하면 억울한 마음으로, 슬프면 슬픈 마음으로 주 앞에 서는 일.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1).” 그리하여 공정한 재판의 날, 주의 심판의 날에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9:8).” 저는 다섯 시가 다 되어 돌아갔고 나는 피곤하였으나 감사함으로 마음이 즐거움으로 돌아왔다. 한 영혼이 주를 바란다는 일, 그 현장에 같이 있어 저에게 말해주고 들려주는 주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확실한 소망인지를 알 수 있었다. 기도해주세요, 하여 우리의 만남을 기도로 마무리하면서, 결코 우리 주님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12).” 확신하였다.
저는 우리의 선한 통치자, 나의 왕이시었다.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76: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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