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전봉석 2019. 10. 8. 07:15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왕하 17:33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시편 71:14

 

 

무엇이 가장 급한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뒤섞여 혼용되고 이도저도 아닌 게 된 것일까?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혼자 남아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이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니 그들의 자자손손이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대로 그들도 오늘까지 행하니라(왕하 17:42).”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생각하다가도 그처럼 이어지고 거듭되는 굴레 앞에 몸서리쳐졌다. 먹는 약을 몇에서 몇으로 줄였다며 이후 부작용으로 침을 흘리던 것이 줄기는 했으나 다소 예민해지고 우울해졌다. 자꾸 부정적인 기억들이 떠오르고, 그래서 억울했던 감정을 들쑤시는 것 같았다. 꿈에서 늘 아이들에게 놀림당하고 외로웠던 기억들이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어쩜! 나도 한참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서도 꿈을 꾸다 울면서 깨어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늘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뭐라 싸우거나 몰리거나 얻어맞는 꿈이었다. 아이는 시무룩하여 그때 일을 자꾸 끄집어내어 말하고 싶어 했다.

 

글로 쓰게 하고 그것을 말로 하게 기다려주는 일이 때론 가시방석 같다. 내 안에서도 불편한 게 같이 요동을 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의 특별한 은혜에 대해 자랑할 수 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나는 아이에게 나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을 말해주었다. 여자반에서 남자 아이 넷이 1년을 지냈다. 4층에서 장애아이가 계단을 구르는 사고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학교당국은 장애아들을 모두 1층으로 몰아 내렸는데, 학년은 이미 시작된 4월이었고 공교롭고 다행스럽게도 6학년 반들 가운데 여자반 한 반만 1층 자료실 곁에 있었다. 우리 네 아이 때문에 반편성을 다시 할 수 없는 학교 입장에서는 우리를 어르고 윽박지르고 강압적으로 여자반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오며가며 같은 또래 남자애들은 비웃고 비아냥거렸으며, 같은 반 여자아이들은 무슨 이상한 세균이나 옮길 것처럼 우리들을 경계하였다. 나의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은 그처럼 지옥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살 놈은 다 살아서 그 때의 일을 떠올리지만 지금도 서러움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곤 한다.

 

아이에게 그 중 몇 가지 재미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나의 생애는 온통 이야깃거리가 많다. 그것이 뭐가 그리 재미난 지, 언제 우울했나 싶을 정도로 아이는 낄낄거렸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이처럼 발휘될 줄은 몰랐다. 같이 내려가 이른 점심을 먹고 아이가 오후 출근을 위해 돌아간 후 두시께 새로운 아이가 왔다! 정말 올 줄은 몰랐다! 양극성정동장애, 흔히 말해 조울증이라 하고, 실은 성격장애로 자신을 가해하거나 남을 해코지하는 두 가지 유형으로 드러날 수 있는, 아이도 어쩔 수 없는 아이 안의 아이로 인해 힘들어하는 아이였다. 2년 전 두 아이가 같이 올 뻔하였던 것을 하나님이 한 아이를 미뤄두셨다가 새삼 이렇게 보내셨다. 아니면 어찌 설명이 안 된다. 애가 왜 와? 것도 나 같은 사람은 싫다고 안 오겠다고 하였는데? 목사고 엄마 선생이었고 종교적인 부분이라 싫고 어쩌고. 좌우지간 그런 이유로 그간 연락도 없이 재내다가, 아이가 왔다. 오기 전에 나 혼자 긴장하여 안정제를 먹고 화장실을 몇 번 들락거렸다. 주님이 하시죠. 지혜를 주세요. 혼자 오래 되뇐 뒤였다.

 

하루 두 시간씩 와서 일(?)을 하는 알바였다. 책장정리부터 시켰다. 같이 묵은 때를 씻어내듯이 버리지도 못하고 싸놓고만 살던 책들을 처분하기로 하였다. 서너 차례 수레에 옮겨 담아 지하 3층으로 내려다놓게 하였다. 얼추 한 시간이 걸렸다. 서로 앉아 벌쭘하면 다시 일어나 일을 했다. 한두 번 더 갔다 오니 아이 이마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시원한 레몬에이드를 타주고 앞으로 정리할 책과 내 뒤에 쌓인 책을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 일렀다. 요즘은 어떤지, 약은 먹는지, 검정고시라도 봐야 하지 않겠는지, 앞으로 어쩔 것인지.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마치 하나도 모르는 사람처럼 아이를 내버려두었다. 우리에겐 무엇이 급한 일일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7-40).”

 

혼자 그 말씀을 붙들고 있었다. 내가 저 애들을 어찌할까? 뭘 할 수 있겠나? 아이가 돌아가고 아이엄마와 살짝 통화를 하였다. 시급 얼마로 주급이 아닌 월급으로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문제는 금세 포기하고 도로 들어앉지 않도록 오래, 장기전으로 이끌어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럼 나도 부탁이 있다, 하고 아이엄마에게 말했다. 뭔데요? 기도해라. 네가 교회를 나가든 말든 믿든 안 믿든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보냈으니 내가 믿는 하나님께 너도 엄마로서 기도해라, 하는 말에 저는 주춤하다 그렇잖아도 다 내려놨어요, 하였다. 원하는 답이 아니었으나 그것으로 되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12:5).” 혹시나 애가 긴장하고 쎄-하면 어쩌나 해서 따로 약사아이에게 물어 내가 먹는 것을 먹여도 되는가 물었다. 그럼 되긴 되는데,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법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하였다. 어쩌라는 건지!

 

잠깐씩 아이와 앉아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나 혼자 마음이 울렁거렸다. 어쩜! 예전에 아이엄마 중딩 때 고딩 때랑 똑같이 생겼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 우리 안에 두시는 마음은 하나라.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사모하게 하시는 마음이다. 저마다 이를 거부하고 각자의 산당을 없이하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고 하니까,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 17:33).” 그 사연이 오죽들 할까! 첫날 나 혼자 너무 긴장해서 그렇지, 아이는 멀쩡하였다. 생각보다 잘 이해하였고 자기가 할 일에 대해 오히려 선의의 마음이 드는 것도 같았다. 것도 그런 것이 생각보다 내가 안쓰러웠는가보다. 앉아 계세요 제가 할게요. 두 번만 더 내려갔다 오면 될 거 같아요. 하면서, 아이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는 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아주 특별한 은혜때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조부모가 그렇고 부모가 그러한 길을 아이들에서는 끊어야 한다. 돌이켜 주 앞에 설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이 이때를 기다리셨다. 나는 그리 확신하였다. 그러니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누가 태국어로 된 성경을 구할 수 있냐고 다 늦게 연락하였다. 몇 군데 검색하니 태국어성경을 구할 수 있었다. 옆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는 여인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사주겠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성경공부 왔다가 가져가라고 했다. 이래저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숨겨지지 않고 드러나는 것 같았다. 고로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정도만 할 수 있는 때에 맡기신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55:22).” 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놀라운 방법인가? 내가 지고 가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나의 애물단지 같은 몸뚱이도 실은 주의 은혜라. 그것으로 겪으며 살았던 그 지긋지긋한 악몽들도 실은 다 이때를 위해 마련하신 일이라. 다윗의 저와 같은 기발한 방법이 실은 저 또한 10대 때부터 도망 다니고, 광야로 숨고, 모진 위협을 당하면서 터특한 게 아니겠나 <짐을 다 주께 맡긴다.> 저는 누구신가?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걸 설계하신 분이다. 모르시는 게 없는 구속자시다. 천하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다. 그 여호와께 맡긴다! 그 주님은 할 수 없는 게 없으시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32:17).” 그렇게 죽었던 나를,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5-6).” 저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04:13-14).”

 

에라, 모르겠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 어찌될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주께서 하실 것임을 확신한다. 계속 보내시든 마시든, 돌이켜 주 앞에 세우시든 더 늘어져 생을 탕진하게 하시든,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그러니 에라, 모르겠다. 날마다 이 짐을 주께 맡길 따름이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68:9).” 그러니 부득불 내가 자랑할 나의 잘난 것은 주의 아주 특별하신 은혜뿐이었다. 나의 연약함이었던 것이다. 주께 맡김은 기도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55:1).” 부르짖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16).” 내 소리를 들려드리며 탄식하다 어느새 주의 음성에 사로잡히는 일이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17).”

 

그리하여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62:1).” 내 마음을 토로할 이시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8).” 오늘 아침 시인의 기도를 따라 읊조리며 주만 바란다. “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71: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