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 곧 아브라함은 조상들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
대상 1:27-28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편 80:7
족보를 통해 믿음의 계보를 점검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아브람이었고 저에게는 약속의 씨로 얻은 이삭이 있었으나 그의 모색으로 낳은 이스마엘도 있었다. 우리 삶의 명암 같다. 밝음과 어둠이 같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브람 곧 아브라함은 조상들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대상 1:27-28).” 세상 그 누구도 완전한 자는 없다. 더 하냐 덜 하냐의 문제로는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주께 구한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7).” 구원을 얻었다 함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소리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사도들의 증언은 엄연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 2:24-29).” 우리의 구심점도 엄연하다. ‘처음부터 들은 것’ 즉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들었던 바로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바로 이것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소리다. 인치셨다는 말이다. 보증하신다는 의미다. 다 같은 맥락이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1-22).”
그럼 도대체 기름부음을 받았다, 성령이 함께 하신다, 보증이 되셨다, 인치셨다 하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여 나타나는가? 실제 그 증거는 무엇인가? 물론 어떤 체험, 놀라운 경험도 해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주관적이다. 부인할 수 없는 내 안의 어떤 확신이다. 그럼에도 이 또한 막연할 때가 있다. 그럼 무엇을 두고 그 증거로 삼을 수 있을까? 첫째, 우리는 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어떻게 아는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딱 보면 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느 순간에 그 엄마를 아는 것과 같다. 여러 명을 섞어 놓아도 아이는 이제 안다. 그 안다는 것은 엄마 키가 몇 이고, 혈액형이 뭐고, 공부는 얼마나 했고, 무슨 재능이 있는지 몰라도 그냥 딱 보면 아는 앎이다. 비록 체험이 없이도 또는 특별한 은사가 없어도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입증이 된다.
그럼 뭘 아나?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21).” 진리를 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복음을 안다. 본능적으로 아이가 아는 엄마에 대한 확신보다 더 확실한 증거로써 안다. 이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우리가 이미 삶 가운데 들었고, 보았고, 손으로 만진 바이다. 가령 이상한 소리로 다가오는 거짓 복음을 안다. 하나님 어머니를 운운하고, 회개가 없어도 된다고 지껄이는 소리에 마음이 벌써 불편해지는 것이다. 이건 아닌데, 싶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 영혼이 불편해하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반대로는 같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기뻐하는 것도 안다.
가령 얼마 전에는 오래된 친구와 통화하는 것도 불편했다. 저의 관심이 나의 관심과 달랐던 것이다. 주식이 어떻고, 골프가 어떻고, 정치를 운운하고 노후에 대해 뭐라 하는 소리가 별로 길게 나눌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먼저 전화도 안 하고 어쩔 땐 오는 것도 받지 않고 넘길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친구는 주의 강권하심으로 교회에 나간다. 친구는 부끄러운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내 안에서는 알 수 없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저가 다닌다는 교회를 찾아보고 그 교회 목사의 설교도 두어 편 찾아서 들어보았다. 이제 내가 먼저 저에게 전화를 걸어 성경공부는 어떤지 물어보고 잘한다 잘한다하고 격려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또 한 친구가 있는데 저와는 여전히 어렵다. 오랜 시간 저쪽 교회에서 모태신앙으로 지금도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그 관심이 와 닿지 않는 것이다. 그 교회 누가 무슨 사업을 대박이 났다는 둥 누군 술집을 냈는데 일 년도 안 돼 분점을 냈다는 둥 그딴 소리에 이건 아닌데, 싶은 것이다. 같이 제직회 끝나고 어디 좋은 데(?) 갔었다는 너스레까지.
두 번째로 내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는 증거는 이처럼 참됨과 거짓됨을 분별함으로 주의 가르침에 따라 더욱 주 안에 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아이들이 오고, 저들에게 향한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임을 안다. 안타깝고 속상하고 답답하고 서럽기도 하지만 이는 단지 인지상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 영혼을 두고 주의 이름을 되뇌게 한다. 가령 스물셋, 아이는 한참 이성에 혈기왕성하다. 어디 예쁜 아가씨를 보고 전화번호를 따려고 했다. 누가 성적으로 느껴져 좋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한참 그럴 때다 하고 넘기기에는 아이의 분별력이 어린아이 같아서, 어제는 우려와 염려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성교육’을 시켰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실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아이는 어려워하였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주신다. 말씀을 중심에 두고 예수를 알아보고 진리를 바로 붙들 수 있는 참된 인지능력이다. 부디 아이에게 또는 토요일에 오는 누구에게 주의 지혜가 함께 하시기를. 한참 여자를 원하고 이성을 찾는 것이라, 나는 난감하고 속상하여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주의 도우심을 바랐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더욱 주의 안에 거하고자 하는 중심이 있다. 이는 굳이 가르칠 필요가 없는, 원하는 바이다. 아이가 그러든 말든, 예수를 믿든 말든, 저들이 하나님을 뭐라 하든 그저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인 것이다. 더는 긴가민가하지 않는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복음은 없다. 이 길이 맞나? 갈등하지도 않는다. 이는 우리가 주의 안에 속하였다는 증거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이제는 하나님이 싫어하실 것 같은 게 싫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은 것이 같은 기쁨으로 다가온다. 내가 주 안에 있다는 것은 때로 특별한 증표나 어떤 남다른 체험이 없다 해도 저절로 아는 앎으로 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제 가려낼 줄 아는 것이다. 아닌 것은 이상하게 불편하고 마음이 썩 개운하지가 않다. 억지로 하게 되는 무엇도 그렇다. 우리 안의 주의 영이 불편해하시는 것이다. 말씀과 진리를 따로 놓으려는 것에 대하여, 회개를 더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하여, 유난을 떨며 성경을 탐구하고 열심을 다하는 일에 대해서도, 누가 또 영성을 운운하며 사람 예수와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를 구분하고, 성경과 성서를 따로 놓고, 교회와 예배를 별개로 하는 따위의 주장에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 거 보면 다들 그 주장이 가지가지이지만 우리는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지 않는다!
이는 단지 수동적으로 저절로 그리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거하게 하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 2:24).” 즉 본래부터의 말씀에 대해서이다. 새로운 게 아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진 의미도 아니다. 요즘 누가 그래? 하면서 친구도 종종 목사의 새로운 표상을 운운하며 자기가 따르는 어떤 목사들의 남다른 정신과 실천을 내게 건네고는 한다. 요는 어느 단체 누구 목사는 젊은이들과 술도 잘 마시고 저들과 같이 하기 위해 어디 클럽도 가고, 같은 세대를 공유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면서! 모르겠다, 나는. 저의 말이 그저 헛소리로 들릴 뿐이다. 말씀에 옛 것이 어디 있고 새 것이 어디 있나? 어느 교회가 새롭다는 둥 뭐가 남다르다는 둥 때론 저의 말을 듣다보면 정신이 다 아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이에 불편하면서 두렵다. 내 안에 주의 영이 거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할 때 더는 꿀릴 게 없다. 쥐뿔도 없으면서 당당하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누굴 부러워하지도 않고 나에게 맡기신 일에 대해 조바심을 내지도 않는다. 저 아이들을 대하며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지언정 내가 나서서 감당하지도 못할 것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내가 저 애를 구원할 수는 없다. 저 애 영혼을 소생시킬 수도 없다. 그의 마음 문을 열 수 없다. 그러므로 가만히 마주앉아 나는 이제 기다린다. 하나님이 어찌 하시려는가, 주목한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에 더는 꾸밈이 없다. 조급할 게 없다. 당당하다. 오게 하신 이가 하게 하실 것이다. 애를 어찌 다룰까, 내가 안달을 부려봐야 내 속만 끓일 뿐이다. 주의 안에 거한다. 내 안에 주가 계시다. 기름부음을 받았다. 성령이 내주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담대함을 얻는다.
내가 못하면 못하는 것이지 꼭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면 아픈 몸으로 힘들면 힘든 대로! 나는 더 이상 뭔가 특별한? 새로운? 어떤 방법? 남다른? 무엇을 구하지 않는다. 주신 대로 할 따름이다. 생각이 많아 요즘 자주 새벽 일찍 깨어나곤 하는데 그럼 또 그것대로, 어쩌겠나? 나의 담대함과 나의 연약함은 함께 하는 것이어서 이래도 주를 의지하고 저래도 주의 도우심만을 바란다. 그래서 이제는 굳이 어떤 결과를 앞서 바라지 않는다. 규정하지도 않고 선을 그어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이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나와 저 아이와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나와 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누림이다.
애를 어찌 잘 건사하며 정상적으로 사회에 복귀시키는 게 목적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은 온통 하나님께 가 있다. 누구를 생각하다가도, 그 애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가도, 나는 돌아누우면서도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되뇌는 것이다. 확실한 약속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2:25).” 그러므로 더는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26).” 그러므로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 다만 주 안에 거할 따름이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28).”
이를 알면 알수록 의연해진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9).”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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