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5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편 77:11
있는 그대로 보태거나 숨김이 없이 서로를 대하고 위할 수 있는 게 교회이다. 그래야 하고 그러려고 하면 일단은 ‘작은 교회’은 면할 수 없는 것 같다. 적당히 입바른 소리가 오가고 겉치레로 위하고 마주하는 게 아니면 사람은 꺼려한다.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마음은 알겠으나 교회 안에서 서로 그리 대하는 거면 굳이 또 교회여야 할 게 무언가? 누가 어디를 다니는데 자신의 그러한 사정을 아무도 모른다는 소리에 답답하여서 하는 소리다. 폐가 될까, 흉이 될까 하여 꺼리는 정도면 아무래도 교회의 사명은 어렵지 않겠나? 그래서 ‘큰 교회’를 간다는 데야 뭐라 할 말은 없는 것이고!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참으로 눈물겨우나 저의 수고로 세상이 정화되고 사람들의 죄악이 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6).” 그런 거 보면 누가 누굴 위해 무엇을 어찌 한다는 것은 모두 헛소리다. 도리어 내가 저를 위해 무얼 하는 게 아니라 저가 날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 그리 여기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이를 분별하기 위하여도 우리에겐 성경이 소중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지금 나에겐 오로지 너다! 가끔은 그런 생각으로 아이를 마주하고 누구를 대한다.
가는 길에, 하는 김에, 누구와 함께 있어서 하는 식으로 곁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이것보다 못한 관계도 없는 것 같다. 저는 나름 배려하는 것이고 신경을 써주는 일이지만 참 교만한 태도다. 물론 나는 사회생활을 거의 안 해본 사람이라 이런 소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예배 마치고 아이와 성경공부가 있었다. 그 시간은 그 아이가 전부다. 누구에게 전화가 들어오는데 거절하였다. 아내와 딸애도 그 시간은 먼저 보냈다. 다 마치고 누구에게 전화를 넣었다. 어디 들러 돌아가는 길에, 겸사겸사하여. 그러고 보니 늘 그런 사람이 있다. 저도 외로운 것이고 바쁜 것이고 나름은 일부러 시간을 내는 것이다. 가끔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아쉽다.
공연한 말을 꺼내서, 앞서 계획하고 생각하는 누구에게 그게 목적이 아니라는 설명을 하는데 성가신 마음이 들었다. 이 별은 유난히 힘들단다. 다른 별은 좀 낫더란다. 영적인 사람들이 하는 소리란다. 하는 저의 말에 뭔 소린지 원. 좀 더 거리를 두고 시간을 보내할 위인이었다. 문득 토요일에 오는 누구의 말이 생각났다. 인천에 있는 같은 보육원 형도 좀 챙겨달라고 한 마디 하였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토요일에 한 번 같이 오라 할까? 하였더니 그건 싫다는 것이다. 나는 저의 마음이 갸륵했다. 온전히 자신하고만 같이 있고 싶은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 77:1).” 오늘 시편의 서두는 그런 의미다. 내 음성으로 내 하나님께 내가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다 같이 귀한 존재이지만 오롯이 너에게 나, 나에게 너로서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12).”
나는 종종 아이에게 그리 이른다. 나를 보고 교회를 여기까지 오는 것도 아니고, 너의 무슨 필요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하나님만 바라고 섬기는 데 있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 이는 사람의 뜻으로 내는 것이 아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솔직히 나는 고백하기를 토요일에 오는 친구가 지금 다니는 교회에 온전히 녹아들어 굳이 인천까지 안 와도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설령 정 때문에 또는 어떤 허기짐 때문에 오는 것이라 해도 그게 전부여서는 안 된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만이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 4:18, 21).” 내가 말씀을 전하는 것 같으나 그 말씀이 저들 가운데서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주의 은혜로만 될 일이다. 고로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오롯이 나만이 주 앞에 서는 것이다. 겸사겸사 더불어 그리 대하시는 게 아니었다. 어쩌겠나? 더디 믿는 자들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이 자리를 지키는 게 나로서는 전부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4:25).” 그들로 인해 마음 상할 것도 아니다. 어쩌겠나. 하나님이 아직 저들 마음을 돌이키시지 않는 데야.
공연히 심란하고 마음이 어려워졌다. 지금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디 주의 긍휼하심이 저를 외면하지 마시기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그렇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3).” 저에게도 주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한때는 바울도 그러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그런 그를 돌이키신 것은 하나님이시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6, 18).”
그때 저는 자신이 잘난 줄 알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사사로이 여겼다. 함부로 대했고 없이 대했다. 그러던 그가 스스로 미련한 자가 되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왜냐하면 모든 게 다 주께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11:23).” 이는 모든 게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한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결국 이 복음은 단 번에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 여기서 ‘믿음의 도’는 진리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3-4).” 결국 우리로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고, 그러기까지 오래 참고 또 기다리는 것이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3:15).”
결국 말씀은 무엇인가? 믿음의 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 영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 천사들에게 보이시는 것. 만국에 전파되신 것.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신 것. 영광 가운데 올리우신 것.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16).” 누구와의 통화로 저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처럼 나로 하여금 말씀으로 끌어당기셨다. 전에는 선생이고 친구고 나의 둘도 없는 동무였으나 이제는 서로가 느끼고 취하는 세계가 다른 것을.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내가 아이에게 공들이는 것 같으나 그리 맡기신 하나님의 시간이고 사람이다. 내가 저에게 그러하고 저가 나에게 그러하여 우리는 온전히 그 시간의 너와 나이다. 무엇을 겸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주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리 마음을 주셨다. 천 명 만 명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는 쇠하여야 한다. 그때마다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 77:11).” 그리고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12).”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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