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냐민이 낳은 자는 맏아들 벨라와 둘째 아스벨과 셋째 아하라와 넷째 노하와 다섯째 라바이며
대상 8:1-2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편 88:13
그 힘이 미약하기만 하였던 베냐민 지파가 귀환 후에는 그 세력이 유다 지파 다음으로 커졌다. 왕정체제 이전(1-28)과 사울 왕가(29-40)를 소개하고 있는 오늘 본문에 나열되고 있는 저들의 이름은 낯설고 생소하여도, 저마다의 생이 있고 그때마다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4).” 정말이지 한 뼘 길이도 안 되는 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쩌면 그리도 많은 이야기들이 넘쳐날까?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붙들고 머리로는 생각하고 가슴으로는 느끼고 몸으로도 실천한다. 무엇보다 신앙의 승패는 균형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만 하고 가슴이 열리지 않아도 실천이 어렵고, 가슴이 뜨거운데 아무 생각 없이 덤벼도 그 실천은 헛되고, 열심만 있어 실천으로 어지러운데 아무런 느낌도 생각도 없을 수 있다.
그러한 우리의 생을 돌이켜 지혜자는 이렇게 역설하였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그러한 세상에 우리의 특별함은 무얼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계시다. 저는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시며 스스로 피를 흘려 제물이 되어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속죄’를 입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믿음의 도리의 사도가 되신 예수를 생각하라 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저로 인하여 우리 모두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즉 이제 우리는 다른 제사장이 필요 없다. 누구를 대언자로 또는 중재자로 세울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특권이란 얼마나 놀랍고 특이하며 감사한 일인지. 가령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나고자 해도 아무나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는데, 대통령의 손녀가 스스럼없이 할아버지 대통령과 새우깡을 먹으며 장난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본 게 기억난다. 우리도 같다. 그 이상이다. 이를 계시록에서 명쾌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5-6).” 그런 우리는 언제든 어떤 모양과 어떤 말로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문득 아이를 앞에 두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그러니 할 수 있는 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 편하게 대하면 좋겠는데 그러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나름은 같이 탁구도 치고 나의 메모장도 옮겨 적게 한다지만! 아이는 모를 것이다. 나는 주께 저를 아뢴다. 무슨 소리든 다 털어놓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셈이다.
아울러 나는 저에게 전해야 한다. 보여주어야 한다. 단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게 아니었다. 베드로는 이를 강하게 언급하는 것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이제 각각의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다.” 즉 나는 베냐민 지파의 후손들의 이름을 읽으며 곧 우리 개개인이 각각의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와 같은 감격은 가슴을 뜨겁게 한다. 그것으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주의 이름으로 저 아이를 대신하여 기도한다. 그리고 방향을 틀어 나의 메모들을 옮겨 적는 일도 부탁하였다. 병적으로 이뤄지는 메모라, 거기에 나열되는 성경 구절과 느낌과 생각들을 아이에게 열어 보이는 것인데! 좀 우습지만 나의 손 글씨가 워낙에 난해하여 아이는 좀 더 신중하게 읽고 여러 번 옮겨 적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통해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역사하실 것을 믿으면서, ‘아름다운 덕’이 선포되어지기를!
바울도 자신을 일컬어 스스로를 복음의 제사장이라 하였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이는 곧 오늘 나에게 맡기신 일이다. 고작 내가 하는 일이란 게 참으로 보잘것없는 일이겠으나, 나의 허접함을 들어서도 주의 세미한 은총이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이제 어떻게 하지? 하고 막연해하며 고민하다가도 굳이 그 답을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였다. 보내신 이가 하실 일이다. 나는 다만 주의 도구라. 어제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그만두었다. 아이가 먼저 아이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를 어찌 할 수 있을지 나는 정말 조심스럽기만 하다. 아이도 알바랍시고 하면서 이 일을 대체 왜 시키나, 싶을 것이다. 나도 어색한데 저는 오죽할까? 그러나 주가 이루실 것을.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바울은 증거하였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과연 내가 이 애랑 이런 걸 하고 있은들 뭐하나싶은 생각이 여러 번 들다가도,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 먼저는 아이가 집에서 나온 것과 그래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 무언가를 하러 여기에 온다는 것과 와서는 묵묵히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다. 더욱이 엊그제부터는 같이 탁구도 치고 장난도 걸고 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는 있는데, 그러는 동안 나의 병적인 조바심과 초조함이 행여 아이를 상하게 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는 또 이중적인 고통이라 스스로에게도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차라리 다 까집고 뒤집어엎어 단도직입적으로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럴 때 문득 읽고 묵상하게 된 내용이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주님을 깨우는 제자들의 이야기였다(눅 8:22-25).
주님은 물으신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정작 우리의 믿음이니 신앙이니 하는 것은 위기를 닥쳐봐야 안다. 그럼에도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답답한 노릇이다(25). 그렇다면 저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없었겠나? 아니다. 저들은 예수를 메시아요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런 확신과 믿음은 정작 죽음의 위기 앞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또 저들은 예수님과 오랜 시간 동행했으며 함께 하였던 믿음이다. 늘 주와 함께 한다는 우리의 동행 신앙은 심리적으로 안정을 제공한다. 믿는다는 사람 열에 아홉은 주님과의 동행을 자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닥치는 위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또 저들은 전형적으로 위기가 닥쳤을 때 다급하게 주님을 찾았다. 부르짖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러니 아무리 신앙고백이 뛰어나고, 주님과 함께 한다는 신앙생활이 투철하고, 다급한 어려움 앞에서 주님을 찾아 부르짖을 수 있다 해도, 정말이지 우리의 믿음은 하찮고 보잘것없기만 하다. 주님이 꾸짖으신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저들도 이런 소릴 듣는데 하물며 나 같은 위인이야 어찌 비교나 될까? 결국은 믿음도 단련이 필요하였다. 훈련이 없이 훌륭한 결과는 없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그러므로 어제 나에게 주시는 아주 강력한 교훈은 작은 일에 충성하라는 것이었다. 주의 일에는 작은 일 큰 일이 따로 없다. 예수님은 이를 보증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그러므로 그저 묵묵히 순종할 따름이다. 나는 어제부터 일부러 조금은 또박또박 메모를 하기로 했다. 문장도 고르고, 그래서 아이가 알아보기에 용이하도록, 의도적으로 메모를 정돈하였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주님은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다만 나는 주시는 능력으로 다할 뿐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요즘은 그래서 더 말씀에 의지하고 보잘것없는 작은 일에도 신중하고 다만 주시는 형평과 사정에 따라 행할 뿐이다. 내 안에 들게 하시는 생각과 그것을 느끼며 뜨거워지는 마음으로, 마치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을 다시 또 하고 다시 또 한다.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시 88:11-12).” 다시 도루묵인 아이를 보면서 낙심하지 말 것과 내가 주님보다 앞서서 무얼 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과 그러려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께 아뢰는 일뿐이라.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3).” 잠자리에서도 몸을 뒤척이다 아이를 생각하고 주를 찾는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14).” 조금은 막연하고 답답하지만,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40: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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