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들은 눈이요 그의 아들은 여호수아더라
대상 7:27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시편 87:5
곧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시 87:6).” 오늘 역대상의 말씀은 하나의 민족이 둘로 갈리어 북이스라엘에 속하였던 잇사갈과 베냐민과 납달리와 므낫세, 에브라임과 야셀 지파의 후손에 대한 기록으로 훗날 저들은 북왕국의 우상숭배에 저항하며 남유다 왕국으로 귀환한 자들의 후손이다. 이와 같이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 그 수를 다 세신다는 오늘 시편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면서 어지러운 저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그 자체로 소중하구나, 생각하였다. 갈리고 갈리어져 더는 그 믿음의 뿌리를 가지지 못할 때의 아찔함에 대하여도 말이다. 이처럼 말씀을 앞에 두고 나열된 저들의 이름을 읽다보면 언급조차 되지 않은 저들의 생은 어떠했을까? 하는 짐작으로 그 하나하나에 담긴 엄청난 저들 인생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이처럼 계통적이면서도 개체적이다.
아이를 보다 그 부모의 이런저런 삶과 그 부모의 부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다, 때가 이르매 주께서 이 아이를 주의 앞으로 부르시기까지의 과정도 지난하지만 유구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흐름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러므로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고 그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은 단순히 그 하나, 개체적인 이야기로 지나는 게 아니라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까지도 연계가 되어져 아찔한 것이다. 가령 선입견으로 아이를 대할 때 범할 수 있는 오류가 바로 그것이다. 부모에게 들은 아이 이야기와 실제의 아이는 다르다. 아이가 말하는 부모 이야기와 실제의 저들 삶은 다르다. 같지 않은 개체의 나열에서 계통을 밟고 이어져온 본성을 깨뜨리고 주 앞에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전우주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오후에 아이와 탁구를 쳤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은 그만큼 마음을 열었다는 거였다. 그처럼 웃음이 많고 앳된 아이인데 너무 일찍 세상을 알고 어른이 되어버린 탓일까? 나는 아이의 그늘이 마음에 쓰였다. 오고 안 오고, 무얼 하고 안 하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부디 저 아이의 닫힌 영혼이 열렸으면 좋겠다. 그리 두고서 나는 기도한다. 우리 안에는 모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 성경은 이를 명시하였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마치 자신은 상관없이 사는 것처럼 굴고 이를 무슨 훈장으로 여기지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 실제 저 아이가 힘들어하였던 것은 선을 갈구하였기 때문이다. 의를 사모하는 까닭에, 그 부당한 죄악의 부모와 부모의 부모들의 죄의 계통을 못 견뎌하다 스스로 팔목을 긋기까지 고통스러워한 게 아닌가?
이미 다들 안다. 다만 서로들 무장하고 사는 까닭은 한사코 자신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이 수치를 가리고, 나무 그늘에 숨어 자신을 부르는 주의 음성을 외면하려는 것 아닌가? 괴성을 지르고 또는 다른 소리에 더더욱 집중하는 까닭도 말이다. 알되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음으로 빚어지는 우둔함과 미련함의 결과가 오늘 날 아이들이 신음하는 소리가 아닐까?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결국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나는 확신하지만 아이들의 고통이 그 부모의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전에 오는 아이는 내내 뚱하였다. 월급날이 다가오고, 벌써 그 돈으로 무슨 옷을 살까 벼르고 있는데 엄마의 참견을 들은 모양이었다. 말이 안 통하네, 원래 그러네, 하면서 아이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다 이내 엄마와의 카톡 내용을 내게 보여주었다. 난들 뭐라 할지….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하고 돌아보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다른 이유가 없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아이의 고민과 이를 늘 당해내야 하는 어미의 심정과 막무가내로 자기입장만 늘어놓는 아이의 답답증까지…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듣거나 말거나 나는 좀 야단을 쳤다. 아이의 얼토당토 않은 말문을 막고 그러한 처신과 되풀이 되는 문제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열을 올리며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도 나는 엄마와 다른 사람이라, 아이는 결국 누그러지는 듯하였다.
가지고 있던 돈 가운데 얼마를 내게 맡기는데 그것이 기특하기보다는 속상하였고, 대견하기보다는 안타까웠다. 스물셋 이제 적잖은 나이에 여전히 누군가의 참견과 간섭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아이에 대하여. 뭐라 한 게 마음에 걸려 같이 산보를 하고 점심을 먹이고 버스를 태워 보내면서 그저 나는 짠하였다. 주님, 하고 아이에 대해 아뢰려하면 마음은 금세 울컥해진다. 그러던 차에 오후에 오는 아이가 한 시간께 원고 정리를 하다 탁구 칠래? 하고 물었을 때 스스럼없이 같이 탁구를 치었다는 것! 너 언제 탁구를 배웠니? 하고 물었을 때, 저 병원에 있을 때요, 하며 입원 해 있던 같은 동갑내기한테 배웠다는 말을, 마치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숨기지 않고 말할 때의 그 속 깊은 아이의 마음이 나는 눈물겨웠다. 하필 그때 우연처럼 아이의 손목에 그어진 몇 줄의 선연하고 예리한 자국이 눈에 들어왔고, 아이의 처절했을 시간을 가늠해보다 몰래 숨이 찼다. 매일 조금씩 탁구 치자, 내가 운동이 필요해. 나는 아이에게 새로운 일을 시키듯 말하였다.
주께서 알아주시기를. 저 아이들의 말 못할 고통에 대하여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시 10:12).” 오죽하니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보내셔서 위로가 되게 하실까. 다 저녁에 같은 복도를 쓰고 있는 저쪽 사무실 사람이 지나는 길에 들른 것처럼 들어왔다. 자신의 사무실이 이달까지 계약이 끝나는데, 그래서 뭐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저이에게는 스물세 살 된 딸아이가 있었다. 늘 바쁘게 일에 쫓기며 살았던 부모와 그럼에도 극성스럽게 학원으로 내몰았던 시절과 오늘에 이르러 이런저런 사연까지, 저는 마치 준비하고 온 사람처럼 구술하였다. 듣다보니 아이가 어릴 때 혼자 집 앞 교회를 다녔었다는 것이고, 그때 그러는 아이를 그냥 두었다는 소리가 기어 나왔다. 이는 또 무슨 계획이실까? 나는 전혀 뜻밖의 내용이라 언제 한 번 아이를 오게 하겠다는 말에 그러시라 대답하였다.
나는 주께 아뢰는 수밖에,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17:6).” 어쩌겠나? 우리 속에는 더는 선한 것이 없는 것을.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롬 7:16).” 누가 가르친다고 되는 일이겠나?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 우리도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죄 때문이다. 본인들은 신음하고 그 부모들은 어쩔 수 없어 손을 떼고 무책임하게 방기하는 저들 영혼에 대하여,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이는 주께서 고치실 일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30:2).” 죽어 마땅한 나를 오늘에 두신 까닭도 그러함을.
오직 은혜밖에는 답이 없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다 늦게 찾아온 누구의 방문과 저의 말이 의외였지만, 다음 이야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로 듣게 하시고 마음에 두게 하신 이가 다음 이야기를 어찌 이어가실지. 다만 이 모든 게 주의 선하심이라! 주께서 이루실 일이다. 곧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시 87:5).” 시온은 하나님의 거처라. 주의 성전이 있는 곳이며, 나의 몸이다. 저 아이들의 영혼이다. 그 부모와 부모의 거역으로 인한 아이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저들 부모가 아직 하지 못하는 통회함으로 나는 아이들을 맞이한다. 할 수 있는 정도에서 맡기시는 것을 알고, 감당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는 바라지도 않는다. 묵묵히 또 무던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주가 이루시는 세계에서 다만 주가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87:6-7).”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54: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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