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전봉석 2019. 10. 22. 07:04

 

 

아므람의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이요 아론의 자녀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며

대상 6:3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86:17

 

 

레위지파의 계보를 보며 저들이 제사장직분을 감당하는 일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우리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와 같은 사명을 묵상하게 된다. 아이들로 인해 마음이 어려운 하루였다. 과연 이러고 있는 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싶을 정도로 도로 그 자리다. 아이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가다 뒤늦게 돌아오고, 아침에 먹은 게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그럼에도 또래 아이들처럼 갖고 싶고 원하는 것은 많아 스스로도 힘들어했다. 초딩 때 좋아했던 여자아이에게 쪽지를 남겼는데 답이 없다고 하였다. 한참 이성에 눈을 뜨는 나이인데 지능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욕구는 차고 넘쳐 이중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다른 아이는 또 어쩌면 좋을까? 섣불리 마음을 열지도 못하겠고 같이 뭘 하자니 조심스럽고, 우리의 이 기형적인 자화상을 보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그 부모의 뻔뻔함에 치를 떨기도 하면서. 도무지 뭘 어쩌면 좋을지 몰라, 나는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116:1-2).” 누구에게 이 말을 하자니 저런 걱정을 할 테고, 저 말을 하자니 이런 변명이 이어질 테고, 그야말로 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도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라. 그 하나님은 누구신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32:17).” 오전에는 이 아이로 인해, 오후에는 저 아이로 인해 괜히 속상하고 마음이 어려워 잠을 설쳤다.

 

누군들 주 앞에 의로우랴.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 차마 내가 저들보다 나은 게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우리는 모두 도우심을 구해야 살 수 있는 일이어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86:17).” 오직 주만을 의뢰하며 나아갈 뿐이지만! 그냥 자꾸 속상하고 답답하여서, 도대체 그러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싶다. 기껏 알아듣게 얘기를 했는데 다음 날이면 도루묵이고, 이제 또 25일 월급날이 다가오니 새로 옷을 살 궁리에 아이는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저의 이율배반적인 의식의 흐름을 나는 감당할 길이 없다. 한참 그럴 때고 또 그래야 마땅하기는 하겠으나, 뭐라 한들 또 돌아서면 그 자리이다.

 

이를 어쩌면 좋은가, 하고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는 대뜸 당신이랑 똑같네, 한다. 그렇구나! 그게 왜 그리 거슬리고 안쓰럽고 답답한가했더니 그게 곧 나였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였다. 그러니 나 같은 위인이 뭐라고 주는 내게 이 일을 감당하게 하신 것일까?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144:3).”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오늘 내게 두시는 또 다른 나를 주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시는가싶어서, 문득 서럽고 문득 속상하다가도 다시 또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마주하는 일이라니! 이제 점점 어른이 되어서 욕구는 물론 갈구하는 힘도 생겨나고 있는데 이를 주체할 수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

 

나는 다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 따름이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116:4).” 하나님은 기어이 순진한 자를 건지신다.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6).” 내 영혼을 이내 사망에서 건지셨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8).” 나는 보잘것없고 도울 힘도 없으나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86:1).” 그것으로 나를 경건하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2).” 그러므로 내 안에 두시는 어떤 속상함마저도 사랑한다. 내가 누구를 위해 이처럼 괴로워하기는 이것이 주의 마음이 아니면 가당키나 할까? 아이와 같이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고 산보를 하면서 나는 무심히 주의 사랑을 묵상하였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3).” 오후께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아이 앞에서 설교원고를 작성하였고 알바아이는 묵묵히 허접한 나의 유년의 이야기를 고쳐 쓰고 있었다. 부러 말을 나누지 않았다. 교회로 오라하고 예배에 나오라 하긴 해야겠는데,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4).” 나는 저의 머리털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다. 하물며 그 마음이겠으며 그의 영혼이겠나? 주님이 하셔야 한다. 주가 아니시면 같이 하는 이 모든 시간이 허사라. 나는 다만 시시로 주를 의지할 따름이라!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62:8).”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랴. 알아달라고 할 수도 없는 마음을 두고 나는 혼자서 끙끙거리다 왜 이처럼 끙끙거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나?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18:7).”

 

하기는 아이들로 인해 나의 하루도 묵묵하였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월요일부터 나는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눈이 마주치고 말을 나누어야 할까 하여 조심스러운 마음에 나는 더 내 일만 하였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돌아가면 나는 순간 방전된다. 소파에 드러누워 금세 코를 곯고 잠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8).” 묵묵히 또 무던히 감당할 따름이다. 달리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가만있으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가만히 보니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려고, 저 아이를 내 앞에 세우셨다. 내가 저희 앞에 서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이 강건하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종종 그럴 때면 나는 마치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편에 선다. 어쩌겠나? 저 아이를 어쩔까? 내가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되레 아내의 말처럼 당신이랑 똑같네!’ 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은 저들 이야기가 내 이여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 영혼의 일이다. 두려워할 걸 두려워하자. 하나님 외에 두려울 게 없다. 저는 도리어 나의 힘의 원천이시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41:2).”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새 힘을 얻게 하시고, 형통할 때나 풍랑이 왔을 때나 오직 주만을 의지하게 하시려고! 오히려 우리는 다 괜찮다고 하는 이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왜 살고 무엇을 위해 싸우고 어째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게 하심이었다. 부디 나의 속상함으로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를 내가 어쩌겠나? 저를 교회로 오게 하고 말고, 믿게 할 수 있고 없고, 이 모두는 하나님이 하실 터. 나는 가만히 또한 잠잠히 주만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86:5).” 그러므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7).” 그리하여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