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전봉석 2019. 10. 28. 07:09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그들은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화살도 쏘는 자요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

대상 12:1-2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시편 92:5

 

 

사울에게 쫓겨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 숨었던 다윗은 시글락에 거처를 두고 저를 찾아온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한다. 정치적인 망명이었든 종교적인 신념이었든 같이 했던 사람들의 면면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삼상 27:2).” 저의 이야기 중에 가장 처절하고 비참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그들 가운데, “그들은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화살도 쏘는 자요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대상 12:1-2).” 하고 오늘의 말씀은 같은 사울의 지파이면서 다윗과 같이 한 이들을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92:5).” 우리에게 있어 종종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실패의 시절이다. 나름 한다고 하는데 그 성과가 미미하거나 오히려 손해를 볼 때 우리는 좌절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살다보면 어쩌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날 때부터 눈멀고 마음이 굳어진 채로 태어난다고 한다. 왜냐하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3).” 그래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 그 현실은 비참하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 이 모두는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정치적인 주장이나 그 수사어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정세를 보며 누구를 지지하고 어느 쪽을 더 두둔하는 마음은 있다. 하지만 이를 누구와 논쟁하고 어찌 말하여 상대의 견해에 대해 비판하고 싶지 않다. 또한 내가 지지한다고 하여 나는 그들이 절대적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저들에게 두지 않는다. 어쩌면 예배가 끝나고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휩쓸리면 걷잡을 수 없다. 손위 처남이라 그 입을 막을 수 없었고 저의 터무니없는 유튜브 뉴스에 환멸을 느낀다. 빨갱이가 어떻고 좌파가 어떻고 하는 말에 치를 떤다. 듣다보면 그 맥락이 다들 비슷한 채널에서 떠도는 이야기뿐이다. 뭐라 한들. 그래도 다행히 아이와 먼저 성경공부를 하고 시험공부로 피곤해하는 아이가 먼저 돌아가고 난 뒤의 대화였다. 나는 이제 그런 이야기에 소모적인 언쟁을 거부한다. 나더러 어느 쪽이냐고 묻는 것도 희극적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느 쪽의 사람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주를 바라며 주를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자신들의 종교적인 신념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치적인 선택도 아니다. 다만 주를 믿고 이를 시인하며 사는 데 있어 세상이 쓸려 다니는 데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다. 진영이 나뉘어 각각의 논리로 대립하는 것은 어쩌면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갈등이다. 이를 조장하여 세를 불리고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나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두고 총부리를 겨누는 일은 얼마나 참혹한가? 전쟁이 더 악랄해지는 경우는 외세의 침입이 아니라 내전으로 인한 동족에 의한 갈등이다. 참혹하고 무섭다. 특히 우리나라는 6.25를 겪었으니 그 격랑의 시대를 지나면서 내재된 적대감은 고스란히 정치에 악용되고 있다. 뭐라 다룰 내용이 아니어서 늘 거리감을 두다 어제는 자꾸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저들의 공격적인 언사에 대해 일갈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12:8-9).” 우리는 주를 시인하는 자들이다. 권력자 누구를 지지하며 그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예배를 종용하지 않는다. 거짓 믿음과 약한 믿음은 엄연히 다르다. 저들은 잘 싸운다. 자꾸 시비를 부채질하여 이슈화하고 이를 정치적 쟁점으로 삼아 사람을 둘로 가른다. 의혹을 부추기고 말이 많다. 어쩜 그렇게도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지! 자기 생각이 많은데 그 생각을 강요하기 위함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나는 그들의 혈기에 동조하기 싫다. 거짓 믿음의 특징은 배우려하지 않고 들으려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을 대적하려고만 한다.

 

성경은 이를 엄연히 하신다.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89:4).” 그러니까 주께서 하실 것이다. 내가 선봉에 나설 일이 아니다. 누가 자기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굴 때 종교도 정치도 한 사람으로 좌지우지 된다.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37:25).” 여기서의 다윗은 그리스도 예수를 지칭하신다. 그들의 자자손손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22:1).” 나는 형님께 그러한 심정이면 가만히 주께 아뢰기를. 저들처럼 광화문에 몰려가고 뿌려대는 전단지에 현혹되어 너는 어느 쪽이냐?’ 하며 마구 총질하지 말고 묵묵히 주만 바라시길.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고 여길 때 이미 그 패는 뻥카. 밑천이 없는 주장에 끌려 다닐 게 아니라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신 주만 바라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우리는 이 귀한 진주를 발견한 사람들로서 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면서도 이를 버릴 수 없다. 조금은 강경하게 그리고 당호하게 저의 말을 제지하고 그만하기를 요구하였더니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도 같았다. 왜 우리가 그것도 주일 날 모처럼 만나 그런 소모적인 정쟁으로 말에 말을 보태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논쟁의 늪으로 빠져들어야 하는지! 나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에둘러 말하기를 정치판의 이야기를 교회에 끌어들이지 않도록, 그런 목적으로 교회를 다니지도 말고 교회 안에서 누구와 설전을 일삼지 말기를. 우리의 옳고 그름은 오직 하나, 하나님은 어떠하여도 선하시다는 것!

 

여기가 시글락이라 해도, 그 처지가 다 실패한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해도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의 기이한 일은 계속 되고 있음을. 우리는 단지 주의 행하시는 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이에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92:4-5).” 부디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자리에 빠지 않기를.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6).” 다만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