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전봉석 2019. 10. 29. 06:52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대상 13:8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편 93:5

 

 

기쁨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의아함과 조심스러움을 같이 한다. 빼앗겼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다윗 성에 모시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성물이다. 이때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4:15).” 하신 엄연함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대상 7, 9). 아차, 하는 순간에 저는 죽었다.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10).”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조금 전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8).” 즐거움으로 뛰놀며 연주하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말씀 앞에 앉아 나는 두려움으로 또는 기쁨으로 되새겨본다.

 

예상하지 못했던 아이가 전화를 하였다. 반가움에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말이 없었다. 잘못 누른 것인가, 하고 아이 이름을 여러 번 불러보았다. 대답은 없고 곧 있자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3 때 그리 속 끓이게 하던 아이로 한참을 저를 위해 기도하였었다. 괜히 서로 마음이 상해 그만두고 고딩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긴 아이였다. 어디니? 글방에 올래? 하고 묻자 그제야 울먹이는 목소리로, 가도 돼요? 하는 것이다. 마음이 어려웠다. 오라하고 문밖으로 나가 아이를 맞았다. 얼추 일 년 만인 것 같았다. 오고 싶었고, 보고 싶었고, 연락을 하고 싶었다는 게 서로의 마음이었다.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의아스럽기도 하고. 아이가 진정한 후 그간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반가움을 나누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93:5).”

 

나는 결정해야 했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행함은 어엿하게. 어느새 이제 고2가 되고, 대학을 생각해야 하는데 글은 잘 안 써지고, 혼자서 몇 번 대회에 원고를 보냈으나 성과는 없고. 나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이제는 전제할 것이 신앙 안에서다. 교회에 와서 함께 믿음 생활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게 싫다면 말 그대로 논술학원을 찾아가고 입시전문 문예창작학원으로 가야 한다. 그저 내가 어찌 다룰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으로 함께 할 것을 권했고 그것을 마다한다면, 그저 가끔 이렇게 안부를 전하는 정도로 족하였다. 더욱 그리 단호하게 말한 까닭은 아이가 혼자 앓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그 가운데 성적인 성향에 대한 확고함에 대하여 나는 감당이 안 된다. 대놓고 그리 선을 그었다. 나는 어찌할 수 없으나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떠하든 너를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신다. 그리 말해주었다. 하나님의 궤는 우리의 기쁨이고 즐거움이지만 두려움이고 엄연한 위엄이시다.

 

나는 한 영혼을 보았고 아이는 정으로 이끌려 눈물을 흘렸다. 나는 하나님을 생각하였고 아이는 어쩌면 입시 문제를 가지고 온 것인지도 몰랐다. 한 영혼의 문제는 단지 그 개인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다시 이처럼 이끄신 게 단지 인간적인 문제로 이끌리게 하시려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리 확신이 들자, 단호하게 말하였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19:21).” 단지 오게 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동성애자로 이를 반대하는 교회가 자신을 받을 수 없을 것이란 아이의 말에 저의 그러한 논리는 자기 소유에 대한 욕심이었다. 동성애자가 죄인이고 이성애자는 죄인이 아닌가?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우리 주님은 이 모두를 용서하신다. 사랑하신다. 나는 아이의 말에 그리 답했다.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낮에 묵상한 내용이 기억난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7:2).” 순교에 앞서 저의 설교 첫 머리에서 조금은 생경한 표현에 주목한 것이다.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우리가 왜 정치적인 편향에 사로잡히면 안 되는지를 생각하다가 마주하게 된 말씀이다. 즉 우리는 진영논리에 휩쓸려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떠나, 가라하시는 명령 때문이다.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3).” 바로 그 곳, 메소보다미아가 어디인가? 이교도의 땅이다. 다신을 숭배하고 달을 숭상하는 갈데아 지방의 우르라는 지역이다. 이교도의 땅에서 달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친인척을 이루며 살았던 아브라함이다. 성경은 앞서 죄악이 관영함에 대하여 여러 번 언급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

 

그것이 동성애자여서 그렇고 이성애자는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이 공산주의자여서 그렇고 자유민주주의여서 아닌 게 아니다. 그것이 진보 좌파여서 그렇고 보수 우파여서 괜찮은 게 아니다. 이 시대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 성의 타락과 범죄를 능가하고 있다. 로마서 2장 후반부에 사람들의 죄악 됨을 나열하였다. 우리는 모두 우준하고 어리석어 지혜가 없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2-23).” 이제 경우 열일곱 살 소녀의 입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을 운운하며 그래서 교회가 받을 수 없는 문제로 자신을 치부하는 데서 놀랐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 나는 말씀 앞에서 우리의 헛됨과 죄악됨으로 치를 떨었다. 그러므로 더욱 단호해야 하는 것은 이를 알면서도 그냥 좋다고 오라할 수는 없었다.

 

나는 너를 감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 같은 이도 품어주셨다! 나의 말을 아이는 이해하였을까? 단지 조건처럼 교회에 와야 글을 봐주겠다는 식의 말이 아니었다!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 때문이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5).” 이처럼 말씀을 되뇌면 그게 다 내 이야기다. 우리의 모든 문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6-27).” , 이 가엾은 영혼이여! 나는 아이의 눈물과 그 느닷없는 연락과 다시 연결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살피느라 마음이 어려웠다. 새벽에 일찍 깨워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신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그게 지금 저 아이가 힘에 겨워 나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까지 찾은 것이고, 나는 저에게서 내 이야기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어느 것 하나도 나와 상관없는 죄성은 없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그게 나였고, 오늘 이 사회의 현상이며 저 아이의 이야기였다(28-32). 그러니 아이가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내가 아이를 맡을 수 있겠나?

 

그렇듯 메소포타미아에 발을 담그고 사는 일이란 서로를 숭배하고, 사람을 선호하며(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나아가 애국애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자들로 조국을 숭배하는 일이다. 메소포타미아에 몸 담고 살던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오늘 날의 아브람들이 그러하다. 우리의 진영 논리와 민족주의와 돈을 숭배하는 삶에서 떠나’,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7:3).” 그리하여 아이가 왔다. 나는 그리 이해하였다. 느닷없는 만남이었고, 의외였고, 그래서 반가움은 곧 두려움으로, 기쁨은 곧 부담감으로 바뀌었다. 행여 내가 웃사와 같은 짓을 범하지나 않을지! 감히 내가 손을 뻗어 주의 성물을 함부로 대하지나 않을까하여!

 

이를 누구는 우연이라고 하고, 누구는 내후년에 있을 대학입시를 앞두고 그런 계산에서 온 거라 하고, 누구는 그 감정이 죽 끓듯 하여 그저 한때라고 하고, 누구는 그러다 말 것이라 해도. 엄연한 사실은, 하나님은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오늘 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메소보다미아에서 신음하는 하나님의 아브라함들에게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7:3).” 주의 영이 저 아이를 이끄심이고 그와 같이 나의 마음을 붙드심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8:20).” 가뜩이나 이혼한 부모와 배다른 언니와의 관계에서 신음하던 아이가 새삼 위로로 택한 것이 동성애였으니, 그와 같이 허무한 것에 굴복하는 것이 어찌 저 아이의 문제이겠나?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21).” 나는 주의 뜻을 바르게 알기를 원한다. 저들의 탄식이 어제 오늘의 일이던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22).”

 

잔뜩 찌푸린 섭리 배후에

하나님의 따뜻한 미소가 가려져있다.

-윌리엄 쿠퍼 (William Cowper)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범한 죄를 거두도록 내버려두신다. 부모의 죄로 아이들이 신음하고 아이들은 살기 위해 손목을 긋고, 동성애를 자청하고, 우울과 심한 성격장애를 겪으면서 산다. 야자시간을 빼고 아이가 불쑥 찾아와 울음을 터뜨린 게 어찌 우연이겠나? 몇 번 왔었고, 연락을 하려 했고, 그 동안 그러지 못하다가 오늘도 친구들과 석식 먹으러 나왔다가 느닷없이 온 걸음이라고 하였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안 됐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가 오늘 날 우리가 사는 메소포타미아가 여기가 아닌가? 다신을 숭배하듯 서로를 숭배하고, 그 몸을 탐하고, 마음을 바라고, 동물에 집착하고, 정에 굶주려 허덕거리는 이 시대에 누구는 애국을 강조하며 조국수호를 숭배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숭상하며 친척과 아비의 집에서 뒤엉겨 살고 있을 때!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13:1).”

 

결국은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섭리 배후에는 하나님의 따뜻함이 그 자비와 은총이 가려져있는 것이다. 나는 두렵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2).” 내가 결코 저 아이보다 나은 게 있어서 오늘의 은총에 거하는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 그러므로 품자. 주의 마음으로 품고 주의 사랑으로 위하자. 어느 가까운 훗날 아이가 고백할 것이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28:16).” 결국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2:12-14).”

 

, 이 큰 경건의 비밀에 대하여!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잠을 뒤척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주의 말씀 앞에 앉아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나는 모르겠다. 사실 너무 어렵다. 아이들을 어찌 대해야 할지, 나는 어떤 입장에 서야 하는지! 한 영혼을 돌아오게 하시는 데 있어서는 전우주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따른다. 내 머리로는 아무리 궁리를 해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8:19).” 이를 서로 외면할 뿐이다.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신다(벧후 3:13). 우리는 거룩한 산으로 산다(11:6, 9). 다시 사망이 없다(21:4, 7:12-17). 다만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친 후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끝없는 고난 가운데서(9:16)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우리의 공통된 괴로움이 아닐까?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11).” 이에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9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