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너보다 하나님이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대상 14:15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편 94:18-19
하나님은 세밀하시다. 알아서 해, 하고 놓아두지 않으신다. 함께 하시고 관여하시며 주도하신다. 나는 오늘 말씀에서 그런 하나님의 참견이 참 좋다!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너보다 하나님이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대상 14:15).” 다윗은 묻고 하나님은 세심하게 앞서 나아가신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의 말씀과도 자연스럽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8-19).” 내 영혼이 주의 위안으로 즐거울 수 있다는 데서 위로를 얻는다. 종종 아이와 같이 있는 시간은 위태롭다. 나의 반응은 예민하고 속에서 이는 불안을 쉬지 않는다. 가뜩이나 비염과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는 눈을 비벼 금세 충혈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순간 불안해진다.
조금 일찍 성경공부까지 마치고 아이와 함께 병원에 갔다. 평소 미루거나 싫어하던 일을 아이로 인해서는 하게 된다. 그러할 때 나의 불안은 외면당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병적인 나의 불안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극복할 수 있다. 누구도 지금 너머의 일을 알 수 없다. 힘에 겨울 때 불안을 느낀다. 이를 장애로 안고 살기도 한다. 현대사회는 불안이 보편화되었다. 미국의 한 해 수면제 소비와 항정신성안정제 사용량은 세계 1위다. 가장 잘 살고 풍요로운 나라의 두 얼굴인 셈이다. 20-30대가 점을 치는 일은 이제 흉이 아니다. 불안은 한 번 처리하면 끝나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재발한다. 나는 아이와 같이 있으면 요동치는 내 안의 수치를 몸으로 느끼는 듯하다. 그럴 때 주님은 주님의 평안을 내 안에 두시겠다고 하신다.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오후에 아이와 같이 있는데 선생의 전화가 들어왔다. 지난번에 거절한 얘기를 다시 꺼내면서 지금의 내 이야기를 책으로 묶자고 하였다. 불안증을 앓고 있으면서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과의 일을 평범하게 있는 그대로 그려가자는 것이다. 재차 선생의 극성스러운 권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주님께 물었다. 저의 의도와 그 의미는 공감이 되었다. 일정부분 어필이 될 것도 같았다. 그럼에도 과연 이 일이 주저되는 것은 행여 나를 드러내어 주의 영광과 의도가 가려지지나 않을까하여! 나는 확답을 미루자 선생은 다음 날 다시 통화하자며 생각해보라고 종용하였다. 주님의 의도가 무엇일까? 내 안의 평안은 주께 두려는 마음이 어떻게 나의 이야기로 전달이 될 수 있을까? 즉답을 피한 것은 주께 물어 주의 세심하신 인도를 바라서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평안하실 수 있었을까?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이었다. 의뢰다. 아룀이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을 ‘아빠’하고 부를 수 있게 하신 이가 예수님이시다. 우리에게도 그리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감히 말도 못 걸고 쉬 다가갈 수도 없는 대상인데 그 사이를 허물어버리신 것이다. 앞서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천하의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호칭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제 창조자 되신 전능자 하나님이 나의 아빠이시다.
이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6-17).” 이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의 말씀이 주야로 읽힌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이를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느껴 삶 가운데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내 곁에 두시는 나와 같은 이들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는다. 종종 아이에게 드는 생각이 고스란히 나의 것이다. 저 아이가 왜 저럴까? 싶을 때 그게 실은 나였다. 때론 못 곁딜 것처럼 굴 때도 그게 나였다. 그러할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순종이라는 데 집중하게 된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과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게 하셨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나도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을까?’ 무엇이 주를 기쁘시게 할까? 선생의 글쓰기 권유는 어찌 보면 좋은 기회다. 막말로 책 한 권 자비출판을 하려 해도 천만 원정도 소요되는데, 이를 오히려 돈 받고 쓰고 돈 받고 팔아 수익을 낼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그 안에 주의 살아계신 역사를 과연 나는 서술할 수 있을까?
요는 불안이 없을 수 없으나 이를 가장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 충돌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일이다. 불순종과 자기고집과 나의 죄를 선호할 때 하나님과 충돌하게 된다. 하나님이 내 편이신 것은 기정사실이고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 편에서 사는가, 하는 일이다. 달리 방법이 없다. 기도하는 수밖에! 나는 선생의 집요한 요구와 설명을 들으면서 주께 되물었다. 할까요? 말까요? 주의 영광을 위해 주께서 주도하실 거면 하고 혹여나 내가 나의 영광을 추구하려들면 막아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는 데서 평안이 온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 7:5-6).” 하나님은 이처럼 실제 상황 중에 계신다.
결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해서도 안 된다. 주가 하게 하시고 주께서 하셔야 하는 일이다.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저 아이들을 어쩔 수 있을까? 무슨 수로 저 아이들을 건사하며 양육할까? 단지 사람의 마음으로는 어림없다. 주님의 마음이어야 한다. 이를 과연 안 믿는 이들이 읽는 이야기 속에 담아낼 수 있을까? 주께서 주의 지혜를 더하셔야 가능한 일이다. 불안이 엄습할 때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가 쉴 때 불안이 스며든다. 이는 내 이야기다. 아이와 같이 있으면서 수시로 깨닫게 하시는 일이다. 거짓믿음은 이를 듣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도 정직하지 못하다. 나는 나의 교묘한 아집을 잘 안다. 누구보다 나의 그릇됨을 또한 잘 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나의 고집도 있다. 부디 주께서 나를 붙드시고 내 삶에 관여하시고 내 이야기를 주도하여주시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시 89:4).” 주가 세우시고 주가 이루시는 나라다.
불안증을 가지고 여러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과 함께 하게 하심은 그것으로 내게 복이었다. 넘치는 기쁨으로 주를 영화롭게 하는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고 여호와께서 모든 이방 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더라(대상 14:17).” 주가 하실 일이지 내가 나서서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 주가 하신다. 스스로 말하길 나는 책을 내지 않고 어디에 이름을 알릴 마음이 없다고 하였으나 주께서 또 이리 길을 열어 가시는가?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시 94:3).” 하나님 없이 승리의 잔을 마시는 세상을 향해 주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다면!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4).” 죽음을 가이드하고 모 대학은 아예 죽음을 연구하는 학회가 있다고 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5, 7).” 이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8).” 주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알릴 수 있다면!
나의 날들 가운데 주님이 함께 계심을. 그 평안이 늘 내 안에 자리하고 있음을.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9).”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이가 오늘 나에게 두시는 여러 일들과 새로운 제안을 살피고 계심을 믿는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11).” 휘둘릴 거 없다. 내버려두고 되어지는 일을 보면 알 것이다. 나는 여태 내가 하려고 해서 얻는 게 하나도 없었다. 주가 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14).” 이를 바로 붙들고 알고 있다면 주가 붙드시고 다스리실 것을 믿는다.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17).” 말씀이 이처럼 나를 주도하신다. 고로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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