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전봉석 2019. 11. 16. 07:17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

대하 2:6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편 111:10

 

 

날이 궂은 하루였다.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하루하루 그 날에 필요한 일용할 은혜와 양식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6:11).” 이는 우리를 위한 기도로 성부 하나님께 구한다. 저는 창조자 우리의 구원자 되신다. 이어지는 기도는 성자 하나님께 고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12).” 이로써 시험에 들지 않게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13).” 이는 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특히 요즘 나의 하루하루는 그때마다 다른 컨디션으로 오늘은 여기가 왜 아픈지, 저기는 어떤지, 종종 구차할 때도 있다. 그러할 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날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삼위 하나님의 은총을 돌아보게 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6:24).” 새가 만일 입고 쓸 것을 짊어지고 산다면 그 날갯짓은 무게로 인해 소용이 없다. 하긴 사람은 하루를 살아가는데 800가지 이상의 물건을 필요로 사용한다고 하는 조사를 어디서 읽은 것 같다. 옷을 입고 신을 신고 차를 타고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하는 데 있어 어쩌면 점점 그 이상의 용품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금으로 만든 2천만 원짜리 이어폰이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옷과 신발이 몇 갠지 모른다. 언제부터는 필요에 의한 게 아니라 취향에 따른 게 되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온갖 허무한 짓을 다한다. 그러할 때 주님이 가르쳐주신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오늘의 은혜와 감사를 늘 되새기게 하신다. 서양 속담에 재물은 구두와 같다.’고 했다. 크다고 좋은 게 아니고 많다고 다 소용되는 것도 아니다. 고작 그래봐야 오늘에 필요한 구두는 하나면 족한 것이다. 또한 우리의 수고에 대하여도 주님은 그리 이르셨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어쩌면 나는 주 안에서 이를 익히며 감사를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제는 괜찮더니 오늘은 어렵다. 어디가 아프면 아픈 대로, 아이들은 이제 그러려니 하고 만다. 같이 멀리까지 산보를 갈 수 있는 날이 있고, 앉았다 일어서기도 힘든 날이 있다. 탁구를 치고 장난을 걸 수 있는 날이 있고 끙, 하고 허리를 쥐고 일어서는 날도 있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내일은 우리 날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날은 오늘뿐이다. 오늘 이 한 날에 감사하게 하시는 것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이다. 그러면서 내 곁의 누구에 대해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더하신다. 저를 불쌍히 여길 수 있을 때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 다하지 못한 용서로 인해 자꾸 생각나면서 괴로운 것은 스스로일 뿐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는다는 의미다. 잊는다는 것은 버린다는 뜻이다.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등 뒤로 두셨고,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38:17).”

 

고통이 평안을 더하신다. 내 영혼을 사랑하신다. 나의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다. 또한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7:19).” 그럼에도 누구는 강박적으로 주를 믿고 따른다. 자신의 그러한 노력이 곧 신앙이고 선을 이루는 줄 아는가? 그때마다 오는 어려움을 점치듯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해서 그래.’, ‘~할 걸 그랬어!’ 하는 식의 저의 말에 그러는 거 아니라 해도, 그래서 저는 집안에 TV도 놓지 않고 자신은 드라마도 소설도 심지어 무슨 영화도 보지 않는 것을 의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니 자신이 이고 지는 무게 때문에 그 영혼의 날갯짓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 아무리 펄럭거려도 날기는커녕 그 날갯짓에 지레 지쳐 신앙이 그저 지겨운 것이 되고는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루에 족한 것이 은혜도 감사도 수고도 시험도 모두 동일하다. 그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더하신다. 애써 억지로 짊어지고 갈 문제가 아닌 것이다. 토요일에 가도 돼요? 하는 아이에게 가족들과 함께 지내라고 하였다. 이번 토요일은 특근이 있어 못 온다던 친구가 다시 올 수 있다고 했을 때 쉬라고 하였다. 나야말로 좀 쉬고 싶어서 말이다. 종일 흐리고 궂은 날씨 탓에 몸은 아프고 마음은 어려웠다. 것도 그 한 날의 수고였다. 말도 안 되는 게 믿음이다. 말씀을 믿는 일이란, 성경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리 여기는 것뿐이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3:11).” 그러므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0:38).”

 

주께서 보내신 한 영혼이라면 또한 나로 하여금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더하실 것을 믿는다. 말도 행동도 저에게 보일 그 어떤 것들도 모두 주께서 예비하시고 작정하신 데 따른 것으로, ‘믿음은 구원의 축이 되는 돌쩌귀와 같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1:10).” 안 그러면 내가 무슨 수로 저 아이를 위로하고 다시 또 사랑할 수 있을까? 오후에 오는 아이가 돌아가고 청소를 끝낸 뒤 나는 의자에 몸을 눕히고 그리 묵상하였다. 주가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다.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그럼에도 한 주가 지나면서 나는 지쳤다. 몸도 마음도 너무 신경 써서 그런가, 만사가 귀찮을 정도로 녹초가 되었다. 사람을 어르고 달래는 일이라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모른다. 이는 애고 어른이고 다를 게 없다.

 

나는 나의 행위의 결과를 두고 염려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 하루, 이 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날에 얼마나 더욱 주를 의지하고 바라고 믿음으로 사는가하는 데 중심을 둘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4:22).”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하셨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23).” 하나님의 친구로 산다는 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4).” 그러므로 한 날의 수고가 족한 것이다. 순종이란 그저 덤덤히 주만 따르는 걸음이다. 같이 동행하며 그 보폭에 의지하는 것이다. 결과는 우리의 몫이 아닌 것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그러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39).” 그럼에도 묵묵히 나아가는 것은,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신 이는 어떠하든 선하시다. 그러므로 고되나 즐거워한다. 기뻐할 줄 안다. 이는 아주 특별한 눈이다. 눈은 봄으로 복되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아이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고, 늘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하나마나한 소릴 또 해야 하는 것 같지만, 그러고 보니 아이가 글을 쓰고 있었다. 그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의 변화로 그 부모가 다시금 주 앞에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한다. ‘주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 보고 기뻐하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실상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라고 하셨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이로써 저 아이도 그 부모의 조상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4:18).” 혈육 간에는 부모 자식이나 앞서 믿음으로 저들의 조상이 되게 하시려고! 이 일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함으로 나는 아이를 위한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에 아무 것도 두지 않았던 것이구나. 오직 나는 주만 믿음으로 저 아이 하나를 위할 따름이겠구나.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4:20-22).” 몰려드는 피로감으로 눈을 감고 허리를 지지며 묵상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111:5).” 하시는 말씀으로 쉰다. 오늘 솔로몬의 진술처럼 무엇으로 열심을 다한들 하늘과 하늘과 하늘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나? 다만 주를 경배할 따름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대하 2:6).”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111: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