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솔로몬이 이 모든 기구를 매우 많이 만들었으므로 그 놋 무게를 능히 측량할 수 없었더라
대하 4:18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편 113:3
주의 전에서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써 우린 얼마나 스스로를 준비하고 있을까? 솔로몬이 준비하고 만드는 과정을 묵상하며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곧 나의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란 얼마나 추상적이면서도 막연한 일일까? 그럼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어디서 드러날까? 아이와 남아서 성경공부를 하며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일에 대하여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여러 번 되뇌며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그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에 대하여,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나 같은 죄인에게 어찌 이러한 직분을 감당하게 하신 것일까? 돌아보게 된다.
이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9).” 그런 자이면서 내 뜻과 내 생각을 앞세울 수 있겠나? 늘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던 일에서 번번이 또 넘어지고 만다. 그러면서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한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을 묵상한다. 우리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의뢰한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누가 과연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을 수 있겠나?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전폭적으로 주를 의지하는 길밖에 달리 더 나은 삶이란 게 있을까? 그러므로 이것이 나타나는 현실은 덕을 세우는 실제적인 삶에서이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내가 누구보다 나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주를 바라며 그 뜻에 따라 내 곁에서 두시는 이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주를 위하여 덕을 세우는 일일 텐데…. 아, 나의 이 옹졸하고 격한 감정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가령 딸애가 다른 교회 어디 청년부 활동을 바랐다. 그러고 싶고 그럴 수 있다면 그러라고 했더니 그리 기도제목을 써서 올렸다. 성경공부 때 아이가 묻기를 누나 다른 교회로 가요? 하는데 뭐라 변명하듯 설명이 이어져야 했다. 돌아와 딸애와 아내를 앉히고 그런 사실을 말하며 과연 그게 옳은가 하고 되물었다. ‘아빠 교회’ 또는 ‘가족 교회’에 대한 어떤 어려움이 그 마음에 가득하였다. 특히 어떤 억울함과 답답함이 그 영혼을 짓누르고 있었다. 뭐라 다그치듯 야단을 치다 언성을 높이게 되었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한참 이어져야 했다. 그러다 문득 나 역시 그처럼 어려워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땐 그게 다 ‘아버지 때문에’라고 여기며 그저 뛰쳐나가고 싶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걸 말로 고백한다고 해서 동조가 되겠나? 내 뜻은 뭔가 다른 환상을 가져본들 그래서 ‘그런 교회’를 찾고 취향에 따른 ‘어떤 역할’을 바라지만 그게 다 허사라.
결국 교회란 서로의 똥기저귀까지 감당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뭐라 화를 내고 설명을 한들, 신앙이라는 미명 아래 ‘더 나은 무엇’을 꿈꾸는 것이었으니 속상하고 답답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 자신의 역할을 찾지 못해 떠돌 듯 다른 데를 바란다면 어딘들 만족함이 있으려나… 공연히 역정을 내며 언성이 높아진 것도 그럼 누나는 다른 교회로 가요? 할 때 나는 나의 설명이 얼마나 구차하고 한심한가를 생각하였다. 내가 붙들어서 될 일도 아니고 꿇어 앉혀 굴복시킨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성경은 말한다. ⓵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라 ⓶ 가르치기 위한 다섯 마디가 방언보다 중하다. 그런데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 14:17).” 하시는 말씀 앞에서 심장이 무너진다. 나는 내 아이의 가슴에 나에 대한 그와 같은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무조건 외면하고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저 ‘나 좋으라고’ 신앙이었나? 하는 속상함으로 울어버리고만 싶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7-19).”
정작 두려운 것은 신앙이란 게 그리 찾아 떠도는 신세로만 전락할 수 있다. 곧 그 마음이 부패할까 두려운 것이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죄란 내가 하나님을 찾으려는 것이다. 찾아오시는 걸 원하지 않는 일이다. 우린 가만히 보면 복에 겨웠다. 여태 할아버지, 고모부, 아빠로 이어지는 ‘가족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아이는 답답했던 것이다. 늘 그 자리인 것처럼 한심하고 어려웠었는지도 모른다. 그 기분이나 심정은 이해한다. 돌아보니 그게 다 핑계였다. 정작 맡기신 일에 대해 한사코 외면하고 마다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 딸애의 말속에 그래서 전에 사귀던 남자도 아빠 때문에 헤어진 거 아니냐고 대들 때 화가 솟구쳤다. 손찌검을 할 뻔했다. 아, 또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한다는 게 속상했다. 이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될 수 없는 말의 과잉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그러라고 했다.
도대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언가?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특별히 허락하신 관계, ‘너에 대하여’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13-14).” 더 나은 목사나 교회를 허락하시기를 바랄밖에. 나는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서 덕도 없고 선을 행함도 없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나는 고유의 은신처인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침울함이 나의 거짓 피난처다. 알면서도 숨어버린다. 더는 말하기 싫어서도, 그런 논리라면 네 엄마도 데려가라. 아니, 교회로 열심히 오는 누구에게도 그리 말해주어라. 나의 투정은 억지스럽다. 알면서도 속상하고 분하여 입을 다물어버렸다.
현세에서 그 삶에 위로가 되는 교회라니! 그 취향에 따라 더 큰, 또는 뭔가 덕이 넘쳐나는 인물을 찾는 일이라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사실 나도 ‘그런 문화’가 부럽다. 뭔가 있을 것 같은 즐거움과 보람과 낭만을 꿈꾸고는 한다. 큰 교회가 주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그 가운데서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고작 이 한두 명, 것도 온전하지 못한 영혼들을 붙들고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아내에게도 또는 딸애에게도 강요하고 억지로 동참하도록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교회’에 대하여 현세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나? 나는 딸애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여기서도 제 몫을 그 역할을 알지 못하고 감당하려 하지 않는데 어딜 간다고 해서 그와 같은 역할을 맡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런 것은 없다. 그저 떠돌다 해는 지고 나중에 남을 것은 후회뿐이다.
그럼에도 그래보고 싶다는 데야, 내가 화를 내고 윽박지른다고 될 일인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나의 이와 같은 고백이 별로 와 닿지 않을 뿐이다. 무서운 말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치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하나님이 그러신 게 아니다. 우리 스스로의 자업자득이다. 아이의 마음에 있는 나에 대한 여러 서운함이나 억울함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 답답할 따름이다. 기어이 사귀던 사람과 헤어진 것도 아빠 때문이라는 말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백날 떠들어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아, 말씀은 어쩜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하시는 것일까? “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난 좀 나을 줄 알았는데, 더하면 더했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위인이었다. 그러니 나 같은 것을 두고 하나님은 대체 무슨 일을 도모하고 계신 것일까? 우린 저마다 고립된 삶을 살뿐이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잠 4:10).” 그것이 설령 아내고 지식이도 이해의 범주에 있지 못하다. 혼자 짊어지고 사는 일의 무게가 새삼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시편의 말씀은 엉뚱하기까지 하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시 113:3).” 즉 어떠하든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모두 그릇되고 자기 고집과 아집으로 끝내 머리에 이고 사는 자기 집의 무게로 등이 굽는다 해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염치없게도 나의 허물과 죄까지도 주께서 선을 위하여 긍휼로 용서하시고 은혜의 은총으로 갚아주시기를. 딸아이의 마음이 위로 받기를. 아내가 주님만으로 새 힘을 얻기를.
그리하여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시 113: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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