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대하 3:1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시편 112:5
우리는 모두 영악하다. 천국에 가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세상은 즐기고 싶다. 하나님 없이 살고 싶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선점하셨다. 오늘 본문은 다시금 이를 알게 하시는 것 같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그저 우연은 없다. 어쩌다 여기, 이런 일, 너에 대하여, 내게 두시는 그 어떤 일도 거저 일어난 게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는 음울한 마음이 늘 있다. 자신만 불행한 것 같고, 자기 고통이 가장 처절한 것도 같다. 토요일에 오는 친구가 그런 식이어서 뭐라 답을 하고 대꾸하기가 곤란할 때가 있다. 부정적인 생각은 감사를 잃어버린 마음의 특징이다.
마음을 준다는 일은 결코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하물며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시 112:5).” 그 일을 정의로 행한다는 말씀에 주목한다. 몸에 밴 선행이란 없다. 모든 죄가 그렇듯 그리 의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단호하였구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결국 믿음의 본질은 실천에 있다. 믿는 것이 추상적이지 않다. 자신을 던지는 일이다. 그것, 곧 정의가 자신을 이끌게 한다. 만일 믿음이 동력을 잃으면 가짜거나 죽은 것이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아브라함도 행함으로써 그 믿음을 입증하였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나아갔고, 하나밖에 주지 않으신 아들을 바치라 하실 때도 그리하였다. 그가 가진 전부는 하나님의 말씀뿐이었다.
성경에서 두 아들의 비유의 비유도 그런 맥락으로 읽었다(마 21:28-32). 아버지가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하셨을 때, 큰 아들은 대답만 하고 안 갔고, 둘째는 후에 일어나 갔다. 큰 아들은 믿는다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는 믿는다는 것이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드러낸다. 성경은 이를 의로 여기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2-24).” 즉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 그저 ‘믿는다’는 추상적인 개념으로의 것이 아니라 일상에 드러나는 실천으로 증명되어진다는 것이다.
어떠해도 아무도 의인은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 그런데 마치 나는 아니라, 괜찮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두려운 일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입을 막으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19).” 스스로 의롭다 하는 것은 바울 이전의 사울의 삶으로 설명이 가름된다. 저는 누구보다 의로운 자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이처럼 말씀을 더듬으며 내 안의 어떤 불편함 또는 속상함을 달래며 주께로 고개를 돌린다. 어쩌면 저의 말이나 그 사정이 나의 것과 다르지 않아서 나 또한 저를 불편해하는지도 모른다. 그럴 거였으면 그냥 오라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잠자는 것 말고 할 게 없다는 그의 문자에 나는 뭐라 답을 해야 할까, 내내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하느니 나야말로 말씀 앞에 앉는 것이 나을 것이라 여겨졌다. 구원은 선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나 경작하고 다스려야 하는 일은 우리의 책무다. 하나님의 명령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두신 오늘의 나와 그 환경과 그 마음을 지키고 다루어야 한다. 내버려두면 잡초가 무성할 따름이다. 이는 우리의 영적인 삶의 기틀이 된다. 그래서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2).” 이는 어쩔 수 없는 숙명 같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영락없다.
하루라고 무심하면 마음은 저 혼자 돌아간다. 조타수는 방향키를 놓아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르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또한 ‘깨어 기도하라’는 의지와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실천을 동시에 놓는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 14:38).” 아는 게 힘이 아니다. 실천이 같이 가야 한다. 아이가 오지 않고도 이런저런 문자를 연신 하면서, 누구의 투정하는 말투며 자기비하적인 발언에 대하여도 나는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아프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그럴 때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불러! 나에게 말해봐야 내가 뭘 해줄 수 있겠니? 그리 말해주고 또 당부하여도 누구의 문자는 여전히 내게는 속상하고 답답하였다. 그러할 때 주님은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17:8).” 또한 명철을 더하신다.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잠 16:22).” 아니면 나는 살 수가 없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려고 해도 내내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으니, 왜 그래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모르니 주의 이름을 부를밖에. 그런 거보면 죄는 얼마나 적극적인지.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잠 7:8).” 결코 저는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다. 그리고 다가오게 한다. 그러할 때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2:16-17).” 우리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얼마나 적극적인가 하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11).” 그처럼 죄란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는 술과 같다. 또한 거짓으로 끝을 삼는데 수레 줄로 함 같이 든든하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그뿐인가? 서로 괜찮다 하고 이를 오늘 현대 사회의 세태라 하고 다 그럴 수 있다고 여긴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붙잡고 부끄러운 것을 모른다. “그 여인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그에게 말하되(잠 7:13).” 내색은 안 했으나 마음은 어려운 하루였다. 차라리 핸드폰을 꺼둘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웠다. 그러니 또 어쩌겠나? 저 또한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몸에 밴 음울함과 외로움과 서글픔과 서러움에 의한 것인데, 돌아보면 안 됐다 싶은 것이 이 모두는 부모의 죄 때문이고, 부모의 부모의 죄 때문이고, 자신의 죄 때문이고 자신의 자신의 죄 때문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의 생활이란 게 열에 아홉은 온전한 가정이 없고 서로가 반목과 불신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자기 서러움에 지치고 시달리며 산다. 그런 이를 우리 곁에 두심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힘을 다해 지켜야 할 것과 다스려야 할 것과 끊임없이 경작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심이었다.
그러니 내가 복이 참 많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5).” 내가 주의 정의로 행할 수 있기를. 미천하나 흔들리지 않기를. 그리하여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6).” 이로써 마음을 굳게 한다. 흉한 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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