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니라
대하 19:7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주를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제한적으로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능가하는 일이다. 곧 우리의 체험에는 한계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이를 저들에게 어찌 설명할 수 있는 재간이 없다. 나의 삶에서 그 사랑이 어떠한가를 돌아보면 뚜렷해진다.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 그 이상의 사랑이시다. 그래서 찬양이란 마음의 짐이 가득한데도 저절로 나오는 탄성 같은 것이다. 요즘 부쩍 나의 이중적인 마음과는 별개로 내 마음 안에 있는 마음을 느끼고는 한다. 가령 ‘저 아이’로 힘에 겨우면서도 주의 마음으로 대하고자 하는 마음과 싫은 마음이 중첩되어 갈등하고 있는 가운데도 주께 아뢰고 구하는 마음이 마음 중에 있는 것이다. 어떠하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러한 갈등 가운데서 거룩이 세워진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이 놀라운 일이 내 마음에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닌가? 거룩한 믿음 위에 선다.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저를 사랑할 수 없고 저를 사랑하려는 나를 견뎌낼 수도 없다. 이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서의 일이다. 내 의지가 아닌 것으로,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이 일이 동시에 진행된다. 싫은데 하고 못하겠는데도 한다. 하는 건 잘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어서 하고, 이를 하나님이 조성하셨다는 믿음으로 한다. ‘이것’으로 나를 지키는 일이었으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이는 ‘영생에 이르도록’ 꾸준하고 무던한 일이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일이기도하다.
말씀이 다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 같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가정예배로 읽은 말씀에서 마음이 찡하였다. 십자가의 죽음만 있다면 이보다 서글픈 일이 또 어디 있겠나? 그렇게 되었으면 유대 베들레헴의 한 젊은 몽상가의 일장춘몽으로 끝났을 이야기이다. 그런데 저를 ‘살리셨고’ 그 이유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하는 이 소망과 맞닿아 있는 구절의 말씀이다. ‘살리셨고’,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행 5:30).” 그것으로 끝이 아닌 이야기로,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20).” 부활 승천하심으로 우리도 ‘살리시리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곧 오늘 나로 하여금 ‘저 아이’와 씨름하게 하시는 까닭이었다. 즉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어서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이는 내가 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얼마나 수시로 내가 나를 의지하려 하는지 모른다. 속을 태우고 마음이 안쓰러워 견디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어제는 유독 숨 쉬기도 힘들고 어떤 불안으로 힘들어서 오전에만 하루치 안정제를 거듭 먹어야 했다. 왜 이러지? 하고 되물어 봐도 소용없는 일이라, 연거푸 안정제를 먹으면서도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이로써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3, 18-19).”
우리로 자라가게 하시는 일로 다시 살리셨으면 그리 행하실 것이어서,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내 자신이 아닌가? 그런 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와 함께 살리시고’ 나로 하여금 ‘모든 죄’에서 사하셨다. 이는 내가 한 것이면 나의 공로이겠으나 ‘아무도 꾸며낸 겸손’으로 자화자찬할 수 없다. 또는 ‘천사 숭배를 이유로’ 삼을 수 없다. 누구, 어떤 이의 도움이 아닌 것이다. 오직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게 하시려고 나를 오늘에 두셨다. 곧 우리를 한 몸 이루어 주의 지체가 되게 하셨으니,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자라지 않는 생명은 헛것이다. 거짓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나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그리고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 어쩌면 지금 나의 씨름은 이것이 아닐까? 저 아이에게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싶은 어떤 회의와 갈등으로 점철되는 일이지만, 그래서 자칫 안타까움과 답답함으로 지레 내가 더 살 수가 없는 것처럼 힘에 부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는 결코 나 혼자의 싸움이 아니다. ‘합하여’ 주가 대신 싸우시는 일이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예수와 합하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그리스도와 합하고,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 뜻을 합하여,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갈 2:2).”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3-4).”
그래서 삼위의 하나님이 합하셨고, 오늘에도 성령의 도우심은 그리스도의 살리심과 하나님의 사랑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7-8).” 이는 거저 주어진 게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다. 이를 알 때 기도뿐이다. 가만히 주를 묵상하고 말씀을 되뇌며 내 곁에 두신 아이를 생각하고 나의 연약함을 아뢰면서 기도하고 기도하기를 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계 8:3).” 더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먼저는 나의 염려나 근심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끌려 다니면 고달플 따름이다. 다른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하여서도 안 된다. 아이를 사랑하되 아이를 위한 일이 아니다. 저들을 위하는 일이어도 저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모두 주를 기쁘시게 하려 함이다.
곧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자신을 지키라는 것은 매우 큰 명령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내 자신이 공격하곤 하는지.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고 지레 겁먹고, 걱정이 앞서고, 병적으로 불안해하면서. 연민에 따른 연민이 이어지고 동정에 따른 동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만이 그 답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8-21).”
가만히 말씀을 묵상한다.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니라(대하 19:7).” 고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다른 길은 없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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