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에스라 9:15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편 4:8
다음 주부터는 성경을 읽다 궁금한 것 하나 이상 질문을 가져오게 하였다. 왜냐하면 너무 지나치게 ‘자기 이야기’에 빠져 있어서 말이다. 기껏 토요일 일찍 성경공부를 와서 반 이상을 자기 이야기만 하다 끝나는 것 같고, 그만큼 집중 돼 있는 관심을 바꾸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입만 열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혼자 있을 때 주로 하는 게 무언지. 생각하는 게 대체 어떤 것인지. 그게 오늘의 너다! 하고 말해주었다. 모든 게 다 때가 있어서,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이를 놓치면 오늘 본문의 한탄스러운 일처럼, “이 일 후에” 누구는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그릇된 삶을 고치며 개혁을 이뤄가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렇게 돼 있다(스 9:1).
‘나는 안 그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남없이 다르지 않다. 오늘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2).” 보면 그렇듯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안 그럴 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악을 악이라 여기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었으니, 물론 이런저런 사연과 사정이 많다보니 그간의 별의 별 일이 다 시비를 걸고 마음을 어지럽게는 하는 것이다. 거의 17년 이상 알고 지내던 ‘도우미’가 있었다. 연락이 와서 더는 ‘그런 것’을 안 한다고 거절하였더니 협박 비슷하게 안달을 부리더란다. 그러니 이런 식이라, 우리의 일반적인 이야기 이상의 사연 앞에서 나 또한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나는 저에게 요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와 같은 ‘성적인 일’은 우리가 싸워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라 피해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멀리하고 상종을 하면 안 된다.
회개하고 더는 안 그런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카톡을 하고 여지를 남겼으니 그도 그럴 만한 게, ‘그것만 안 하면 되지’ 싶은 자기 선호에 대해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곁에 같이 근무하던 태국 여자에 대해서도 다신 안 그래요, 하면서도 회사를 그만두려하니까 잘해주고 다른 데 가서도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에 마음이 또 술렁거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런 걸 하라, 마라,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아예 눈길도 주지 말고 관심도 멀리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고 하니, 토요일에 오는 목적을 분명히 하라고 일렀다. 성경공부를 하고 그에 따른 궁금한 것과 평소 말씀에 있어 삶에 적용하기 어려운 것, 그 말씀에 대한 새로운 앎을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일렀다. 관심을 통째로 바꾸지 않는 이상 특히 성에 대하여는 별 수 없다. 남자나 여자나 자신할 수 없는 게 그 관계다. 그 사이에 말씀이 있어야 하고 사적인 교류는 배우자나 동료가 함께 해야 한다. 교제가 투명해야 하며 성적인 일로는 뿌리치고 피해야 한다.
오늘 우리의 구원은 엄청난 값의 대가를 치렀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허투루 여길 게 아니다. 한데 자꾸 옛 생활로 돌아가고 특히 성적인 일에 발목을 잡혀버리면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라. 오늘 에스라서의 말씀이 속상하고 답답하기만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냥 죄에 젖어든 게 아니라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저들은 누구인가? 엄연히 구별된 백성이다. 귀환을 서둘지 않거나 못하게 된 계기가 어떠하든 남은 자로서의 방종은 근신하고 깨어있는 일보다 수월하다. 열에 아홉은 돌아간다. 돌아가면 더욱 악하여진다.
전보다 그 사정이 더욱 악해지는 것이다.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4-45).” 나는 그래서 요즘 친구에 대한 노파심과 그 기도도 그렇고, 토요일에 성경공부로 오는 이 친구의 처지나 그 사정도 그렇고, 자칫 그 처지가 전에보다 더한 지경에 빠질 수 있어 노심초사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삼하 14:14).” 주의 은혜로 돌이킨 게 아니었던가? 차마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는 ‘어둠의 생활’을 돌이켜 주의 빛 앞에 선 것인데…. 말 그대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탄의 눈짓을 감당할 길은 말씀과 기도뿐이다.
가만있으면 영락없다. 그럼 어찌 해야 할까? 첫째,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의의 증인으로 세우시고자 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이는 당연하여서,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단 2:21).”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변화된 삶은 그 자체가 증거가 돼야 한다. 섣불리 누굴 동정하고 위로할 게 아니다. ‘애 둘 있는 여자’가 아무리 살 길이 궁하다 하여 ‘도우미’로 일하고 다니며 개별적인 관계를 취하고 사는 데 있어 이를 그저 ‘그럴 수 있는 일’로 가벼이 여기면 영락없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8).” 이에 대한 지혜를 구하여야 한다. 때론 죄에 대하여 누구보다 냉정하고 냉혹해야 한다. 고름을 아까워하고 굳은살에 미련을 두어서는 어림없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둘째는 이제 남은 세월을 아껴야 한다.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시 89:5).”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친구와 통화할 때, 그렇듯 열심으로 주를 사모하며 성경을 상고한다고 해도 이제 길어야 2, 30년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건강과 총기를 주셔서 80 이후에도 말씀을 음미하고 묵상하고 산다해도 말이다. 그러자 친구는 놀란 듯 씁쓸한 듯 그렇구나? 우리 나이가 이제 그렇게 되었구나? 하며 회환에 젖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나는 어제 성경공부를 하다 토요일에 오는 친구에게 특히 더 강조하듯 말하였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가지가지 얽히고설킨 사람 사이도 기준을 분명히 하여 끊을 것은 끊어야 한다. 누가 토요일에 인천까지 성경공부를 오면서 왜 한 번도 들르지 않느냐고 하며 채근했다고 한다. 만나봐야 술자리라, 그렇다면 됐다. 연연하여 끌려 다니지 마라. 나는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우리는 결코 천년만년 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아닌 건 아닌 거고, 신앙에 방해가 되는 일과 사람과 생각과 자기 넋두리를 과감히 처분해야 한다. ‘그래도 사람 관계가 어찌…’ 하면서 미적거렸다간 순식간에 끌려가기 십상이다. 안 그럴 자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다 그렇다. 남자나 여자나 성적인 문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요셉처럼 도망쳐라.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0-31).” 뭐 그리 대단한 사람 사이는 없다!
나의 말은 냉정하였고 그래서 외톨이가 된다면 것도 감수할 일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사는 사람들이다. 총체적으로 근신하라는 게 그런 의미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종종 누구의 사연을 듣고 있다 보면 공통된 게 하나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해는 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오죽했으면 자기 자식을 살인했을까? 이해는 한다. ‘전두환’도 이해 못할 건 없다. 안 됐다, 어쩔 수 없다, 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모든 죄악은 순식간에 ‘그럴 수 있는 일’로 둔갑한다. 오늘 에스라서 본문의 요약은 그런 게 아닐까? 저들이 어쩌다 귀환에 밀려 여전히 포로 된 생활에 남아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래서 통혼을 하고 우상을 섬기고 그 모든 죄악의 으뜸이 될 정도로 무뎌지게 되었는지… 이제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람이라.
그래서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 3:15).” 그러므로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18).” 무엇으로 값을 치르던 이를 잃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거머리의 두 딸이 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30:15).” 족한 줄 알지 못하는 것이어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시 4:2).”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꾸짖는다. 결국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3).”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주를 부르는 것. 주께 아뢰는 것.
그리하여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4).” 행여 잠자는 중에도 생각지도 말 것을.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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