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에스라 10:1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시편 5:7
올해 마지막 주일, 만으로 10년 세월이 되었다. 그 시작은 얼떨결에, 09학번으로 신대원을 다시 시작하였고 그 다음 해부터 사역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 필수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무 소임을 감당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하다 누가 ‘글방’에서 ‘교회’를 시작하면 된다는 소리에 글방 몇몇과 예배를 시작한 게 그해 12월이었다. 그러니까 까마득한 세월인 것 같은데 이제 겨우 10년이 되었다. 찬양을 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의 고백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이 하나가 되는,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막 9:7).” 삶이 복되었다. 곧 제자들 중에서도 변화산에 있는 자만이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증언할 수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누구는 지나가고 누구는 머물며, 누구는 기억에 없는데 누구는 여전히 마음에 남았다. 우리가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에 늘 새롭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나는 교회를 이루어가고 목회를 한다는 것이 특정한 누구, 어떤 이가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사명이라 여긴다. 곧 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이다. 대수롭지 않고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일에 주의 이름으로 임할 때, 나는 손위 처남에게 말하였다. 여기 이 한 아이를 주의 이름으로 대하는 것이 목회다. 목사여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 믿는 사람들의 본분이었다.
현재 다니는 교회의 이런저런 외모나 담임 목사의 이런저런 목회 방향이 어떠하다 하여 그처럼 마음이 어려우면, 그 일을 입에 올리기보다 주께 묻고 조용히 그 뜻을 구하는 게 낫다고 조언하였다. 은퇴 후 신학을 했으면 하는 것이 단순히 성경에 대한 열의와 더 알고자하는 사모함 때문이면… 저의 말에 말을 보태다가 그만두었다. 들으려하기보다 말하려하는 이에게는 달리 손 쓸 길이 없다. 다만 나는 말하길, 저 아이 하나로 천하를 얻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면서 간다. 다들 어떤 외형적인 것을 꿈꾸고 비교하고 앞서 그리 생각하지만 생각하는 일과 실제 사는 삶은 다르듯이 사역에 대한 꿈과 실제의 부르심은 엄연히 다르다. 어쩌면 나의 이런 태도는 철딱서니 없는 소리와 같다. 그러나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종종 혼자 생각하기를, 그냥 할 뿐이다. ‘주의 이름으로’ 아무 소용없는 일인 것 같은데도 저 하나를 두고 간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다며 기도하는 것은 괜한 수사어가 아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엄연히 예수님은 아기로 오셨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였다. 구원자가 속수무책 아이로 자라나셨다니. 그런 아이를 품에 안고 축복하시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그리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6).”
또한 이방 여인의 아이도 고쳐주셨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곧 우리에게 더하신 사역이 세상적인 일처럼 그리 가시적이거나 외형적인 성과로 판가름 나는 게 아니다. 나는 누구의 열심을 오히려 염려하는 것은 그것이 지적 허영이나 자기만족이 될 소지가 높아서였다. 정말 많다. 들어보면 가르침을 받고자 하기보다 가르치기를 원하고 누구의 말을 들으려하기보다 말해주려 하는 것이어서 저는 늘 스스로가 답답하다. 왜들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지 모르겠다. 다를 문제가 많다. 그리 여겨지니 누구와 같이 뜻을 합할 수 없다. 말을 하려다 말을 그만둔 까닭은 그래서이다. ‘어린아이’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그 품은 뜻을 알 길이 없다.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17:18).” 아이는 어른의 선생이다.
그 아이, 보잘것없고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 존재를 영접하는 것이 곧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이 논리가 성경의 길이다. 허접하고 별 볼일 없는 일이라고 외면하면 보이지 않는 길이다. 굳이 은퇴 후에 신학을 하겠다니, 그것도 정규 과정은 너무 오래 시간이 걸리니까 총회나 노회처럼 군소 신학을 운영하는 데서 간략하게 과목을 이수하여, 그런 뒤? 목사가 되고 싶다는 소린지, 목회를 하고 싶다는 소린지, 그저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는 소린지… 웬 성경 통독학교? 누가 성경 암송을 그리 강조하며 무슨 성장을 꾀하는 모양인데 당최 무슨 소린지!
말이란 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듣는 자의 것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모르겠다. 나는 내가 잘 아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 누구처럼 꿈을 꾸고 계획을 하고, 그것을 추진하여 나갈 능력이 없다. 그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겨우겨우 감당할 뿐이다.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사 64:5).” 내가 무슨 수로 나의 구원을 이루며 누구를 세워 주 앞에 인도할까? 오히려 그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열심과 수고와 맹신적인 열의가 나를 두렵게 할 뿐이다.
다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여기로 오라마라, 가라마라 할 수 없다. 와도 감당이 안 되는 인물이라! 모든 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시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7).”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워 떨 뿐이다. 그저 소금된 자의 사명을 다할 뿐인데,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내 안에 소금을 두라 하심은 누구를 죽여 절이는 것보다 내가 주의 말씀에 절여서 뻣뻣한 순을 죽여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할 때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주가 알게 하셔야 하는 대목에서는 입을 다물거나 상대의 말을 꺾으려 하지 않는다. 그냥 그 앞에 있을 뿐이다. 저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게 중요할 거 없다. 여느 다른 교회를 알아본다고 하니 그러신가? 하고 말을 말았다. 내 속도 모르겠는데 하물며… 오늘 본문의 에스라처럼 기도할 따름이다. 이에 함께 회개하는 자들과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이는 나의 중심이 분명해야 한다는 반증이다. 주만 보고 할 뿐이다. 아내도 자식도 처가도 가까운 누구도 아니라,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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