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전봉석 2020. 1. 1. 06:39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헤미야 2:4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편 7:10

 

 

새해가 밝았다. 아침에 일어나 주 앞에 앉아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5:3).” 수천 년 전 느헤미야도 그러했고, 다윗도 그러했을,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90:14).” 아침에, 말씀 앞에 앉아 하루를 시작하고 전날의 일과를 돌아보며 새로운 다짐으로,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143:8).” 이는 참으로 나를 주께 드림이다. 때로는 습관에 따라 그리하나 이와 같은 기도의 본은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22:39).”

 

느헤미야가 세상 권세 잡은 자 앞에 설 때 앞서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하였다는 대목에서, 그러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령 나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속이 터져서 묵도한다.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횡설수설하는 아이의 말에 나의 기도를 더한다. ‘아픈 아이여서 그런다지만 얘는 또 뭔 소린지, 그 속을 알 수 없고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나는 묵도한다. 글을 쓰겠다는 아이가 일기를 쓰라는 말에 저처럼 발끈하며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그저 내 속이 다 시끄러웠다. 지겹기도 하고, 같이 헛소리를 해대는 것 같아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데 또한 신기하게도 묵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이기도 하다. 이처럼 거룩을 담아내는 일은 위험하고 위태롭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12:28).” 은혜가 아니면 감당이 어렵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29).”

 

묵도는 나를 돌아보며, 나의 죄 된 모습을 먼저 자각하게 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6:5).” 솔직히 어제는 애가 너무 싫었다. 안 해, 너 가, 오지 마! 하고 싶은 마음이 목울대를 치고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싫은 데 싫지 않은 것이다. 순간 욱, 하고 올라오는데 이상하게 웃음도 같이 주시면서 아이의 실없는 소리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 나의 죄 된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하시는 까닭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상기시킨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7).” 나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건네시는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게 하심으로 나 같은 자도 받으시고 용서하시고 이처럼 귀히 여기시는데 하물며 내가 저 아이를 어찌 싫어할까? 얘도 그렇지, 가족끼리 저녁 먹기로 했다며 오자마자 일찍 간다는 아이가 엄마의 전화를 받고도 한 시간은 족히 더 있다가 갔다. 전에 같으면 삐쳐서도 휑하니 일어섰을 텐데, 애 안에 깃든 주의 간섭하심을 보았다. 얘도 얘가 하는 게 아니겠구나! 가족들이 해돋이를 보러 간다며, 신년 예배시간을 묻고 늦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주의 천사 중 하나가 주의 제단에서 핀 숯을 내게 건네는 것이다. 숯은 은혜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25:22).”

 

이를 알 때 내게 더하신 소명을 다시금 선포하게 하신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6:8).” 앞서 아이의 글을 읽고 속으로 답답하여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배배꼬인 아이의 심성이 성가시기도 하여 다 때려 치고 싶은 속셈이었는데넙죽넙죽 아이가 말을 받아 너스레를 떨면서 도망치지 않는 모습이 대견하고 신기하였다. 그러니 내 안에 이는 마음을 나도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누가 이 아이를 맡을꼬? 하고 주께서 물으시는 것 같았고 그러니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는 나의 본심과 다른 마음은 또 누구의 것인가? 나를 보내소서! , 이 일이 나에게 두신 소명이구나. 내가 감당해야 하는 소임이구나! 일주일에 이틀 오는 것도 이처럼 지겹고 힘든데, 다음 주부터 방학이라는 소리에 그럼 매일 오후에 와서 여기서 글 쓰고 성경공부하자고 제안을 하였으니.

 

이것이 곧 주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인가?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감히 주께 아뢰어 아이를 마주하고 그 상한 마음을 어르고 달래며 함께 기도하게 하시는 거였다. 너무 속보이는 일이었지만 나는 하기 싫어서 나는 아이와 함께 기도부터 하고 시작하였다. 여전히 아멘도 하지 않는 아이를 붙들고서 말이다. 애가 참 고집이 세다. 4차원적이고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르겠다. 이는 스스로도 하는 소리다. 이를 자랑처럼 여긴다. 자신이 동성애자인 것을 강조하고 나름 한다고 하는 것을 자부한다. 그런 거 보면 애나 어른이나 사람은 참 가지가지로 자기 고집에 매여 산다. 뭐라 한들?! 나 또한 다를 게 없는 것을 여실히 느낄 따름이다.

 

그러므로 나는 복 있는 사람이다. 이처럼 아침에 묵도하고 말씀 앞에 앉히시는 이가 또한 열어주시는 눈으로 보고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듣게 하시며 보여주시는 일을 보게 하신다. 내가 나로 충족하려는 마음을 버리게 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일깨우신다. 섬김으로 주를 바라게 하시더니 믿음과 순종으로 내 안에 웃음을 담아주신다. 아이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돌아와서 알 수 없는 마음으로 감동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뭔 소리야? 싶게 아이의 원고를 처음 읽으며 일었던 짜증스러움과 그 글을 가지고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마음과 그래서 당장이라도 관둘 생각밖에 없던 내 안에 아이에 대한 사랑스러움이라니! 이게 당최 말이 되는 소린가?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90:2).” 나는 일련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느낀다. 살아계셔서 우리를 통제하시는 주님이시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46:10).” 곧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아이가 그냥 나를 찾아오는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가 그저 내 개인의 글방이 아니었던 것이다. 곧 주께서 주의 모든 기뻐하시는 것을 이루시는 장소였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4:35).”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2:20).” 내가 그의 성전에 있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만 뜸한 게 아니었다. 윌리엄 케리는 인도에서 7년 만에 세례 교인 하나를 세웠다고 한다. 저드슨은 버마에서, 로버트 모리슨은 중국에서, 모팟은 아프리카에서, 헨리 리차드는 몽고에서 각각 그만큼의 시간을 허비하듯 허송세월을 보낸 것처럼 아무런 성과도 소득도 변화도 모색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도 묵묵히 인내와 기도와 수고와 소망으로 버텼다고 한다. 모르겠다, 나도. 이러고 있는 게 맞는지, 저 아이를 데리고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지.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6:13).” 이내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때는 아무 것도 못하게 하시더니 나는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두 손 들 때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시작하게 하시는 거였다. 내가 널 어쩌겠니? 하고 돌려보내려던 내게 아이를 붙들고 기도부터 하게 하시더니, 주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다. 내 안에 두시는 마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오늘도 이처럼 새 날을 허락하시는 이유이겠다. 결국은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7:17).” 이를 알게 하시고 하게 하시려고, 저 애가 아니라 나를 말이다. 내가 저 애에게 뭘 하는 줄 알았는데 내게 주께서 뭘 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2:20).”

 

말씀 하나하나가 다 내게 주시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7: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