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왕의 명령대로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할 일을 정해 주었기 때문이며
느헤미야 11:23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시편 16:6
성벽 재건이 끝나고 영적 각성의 순간도 지나서 실제적으로, 성내로 이주를 권하였다. 포로에서 돌아온 뒤 7장에서 1차 정착민들의 명단이 있었는데 오늘 2차로 성내에 들어와 살게 된 명단은 그 수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행하는 데 있어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느 11:1).” 이러할 때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잠 18:18).” 그 일의 결정에는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 “오직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지니라(민 26:55).” 소모적인 정쟁이나 다툼을 없앤다. 또한 일을 정하는 데 있어 다소 규율과 규칙이 유용하다. 오늘 본문에서 그 대목이 인상적으로 읽혔다. “이는 왕의 명령대로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할 일을 정해 주었기 때문이며(느 11:23).”
이게 보니까 할 일을 정해준다는 게 필요하다. 뭘 쓰지? 하고 아이가 턱을 괴고 마냥 앉아있을 때 그 줄기를 잡아주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물론 이를 참고 사항으로 받되 정해진 분량과 그 테두리 안에서 글을 전개하도록 유도하는 까닭은 ‘내가 알아서 할게!’ 하면 영락없이 주제를 벗어나거나 엉뚱한 소리에 팔려 그 내용은 장황해지기 일쑤다. 이렇게 예를 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한 달에 한 번 아버지가 오셔서 설교를 하는 주일이면 그 주간은 조금 느슨해진다. 월요일부터 본문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접근하다 수요일쯤에는 가닥을 잡고 본격적으로 구성을 하고 작성을 하기 시작해야 하는데, 헐렁해진 시간에는 틈이 생겨 딴 짓을 하게 되어 있다. 희한하게도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이번 주간도 설교 원고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어서 느슨하게 굴다가 아내와 딸애가 독감이라 연로하신 부모에게 옮길까하여 다음 주일에 오시기로 하면서, 어제는 종일 앉아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다듬었다. 곧 할 일이 정해진다는 것은 유익하다.
이를 오늘 시편의 표현으로 다시 정리하면,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 하는 의미가 된다. 오늘 내가 하는 일, 나에게 두신 사명과 맡기시는 일에 대하여 묵묵히 나는 그 일을 준행할 따름이다. 믿음의 분량대로 말이다. 즉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내게 두신 한 날의 일이 귀한 것이다. 누군 열 사람을 상대하고 누군 백 사람을 상대한다 해도 그건 또한 그들의 몫일 테고, 행여 이를 시샘하거나 누구처럼 되려는 듯 구는 태도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135:3).” 곧 오늘 나에게 정해주시는 일에 성실한 것은 주께 찬송이 된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가는 동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더도 덜도 아닌 내게 능력주시는 만큼만 하는 일이다. 곧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때론 이해가 안 되고, 내 기준이나 생각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세상에서 무던할 수 있는 길은 주를 신뢰하는 신앙뿐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이게 어찌 말이 되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할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무던히 또 다음 보폭을 옮기는 일이었다. 저 아이가 어찌될지 누가 알겠나? 오히려 오늘 나의 부족함은 딛어야 할 걸음에 힘을 더한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살전 2:9).”
무던히 내 할 도리를 다할 수 있는 것은 그 수고가 모두 주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아이가 오고 안 오고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아이가 오고 나의 일도 정해진다. 오면 힘들고 안 오면 느슨해진다. 헐렁해진 시간은 순간 막연하여서 딴 짓을 하게 돼 있다. 마침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였다가 이를 정리하는 일을 아이가 오지 않은 덕분에 느긋하였다. 종일 교회에 머물면서 나는 여러 책을 겅중거리듯 읽고, 메모하고, 밑줄 그은 부분에서 설교 원고에 보탤 내용을 인용하고, 묵상하는 일은 유익하였다. 그러는 동안의 외로움과 고독에 대하여는 얼마든지 그 값을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어서, 문득 모세가 다른 백성들은 느끼지 못했을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길 수 있었던 계기도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신 1:31).” 며칠 동안 이 구절 하나에 꽂혀 있었다.
우리 삶은 누구나 광야를, 당한다. 말이 좋아 광야 같다는 것이지 그 삶이 얼마나 팍팍하고 천박한가! 다들 사는 거 보면 죽어라 하고 산다. 살면서 그 위로를 젊은 애들은 오락에서 풀고 늙은 사람은 회환에 젖어서 푼다. 푼다고 풀면서도 누적되는 피로감으로 죽을 지경인 게 광야다. 이를 당하였거니와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람이 자식을 품에 안은 것처럼 우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인도하셨다! 나는 그리 여겨져 감격스럽다. 모세가 전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 하나님은 늘 먼저 가시고, 먼저 싸우시고, 먼저 행하셨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30).” 이를 목전에서 느끼고 먼저 누릴 수 있어서 모세는 행복하였다.
비록 여든 한 살의 노구를 이끌고 시내산까지 온 광야의 여정이었지만, 앞으로 서른아홉 해를 거듭하여 거쳐야 하는 길이었으나, 저는 훗날에 단언하여 고백할 수 있을 것임을 알았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32:6).” 이를 어찌 느끼지 못하는 백성들을 두고 답답하게 여기며 주가 어찌 보답하셨는가. 저는 우리의 아버지시다. 우리를 지으신 이시다. 우리를 만드셨고 세우셨다. 증언하는 설교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33:27).” 그러고 보니 주가 행하신다. 내가 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정해진 하루를 정해진 행동반경 안에서 정해진 일을 수행할 따름이다. 이 기쁨은 단순하고 명료하였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포기하지 않으면 거두리라. 이 말씀 붙들고 하는 일이다.
당장 저 애에게 뭘 바라고 하겠나? 어떤 큰 기대를 두지 않는 까닭은 더 큰 기대가 있어서이다. 그럴 때 나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방해만 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그러느라 나는 지겹도록 아이가 쓴 글을 읽는다. 소리 내어 읽다가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짜증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읽는다.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중을 알고 싶어서이다. ‘이런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하고 다음 정해주시는 일을 받기 위해서이다. 요즘은 부쩍 그런 생각을 한다. 애를 보고는 할 수가 없다. 싫증도 나고 쓴물도 올라와서 애에게 기대를 걸어서는 하루도 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면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 그 너머 하나님의 섭리를 느낀다. 하나님의 의도를 헤아려 알고자 하여 여러 설교자의 글을 읽고 동영상도 종종 본다. 나는 이제 다른 데 관심이 없다. 누가 뭘 하고 어떤 일이 수익을 내고 노년에 어쩌고 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늘부터는 아이가 싫어해도 성경공부를 우선적으로 할 생각이다. 아이도 아이 자신에게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데, 나도 그 아이의 이야기에 관심을 쏟고 있을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이다. 프로이트는 동기나 원인을 분석하고 아들러는 그 행동의 목적을 분석하고 칼 융은 현실의 기제를 분석한다. 그런데 새삼 놀라운 것은 성경은 결코 우리를 관심에 두고 그 초점을 사람의 살림살이에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모든 사건과 행동과 그 생각의 근본에는 죄가 있다. 죄와 악과 오만함은 기정사실이다. 그래서 시인은 악이 아니라 악인의 꾀를, 죄가 아니라 죄인의 길을, 오만함이 아니라 오만한 자의 자리를 주목하였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왜냐하면 우리도 여전히 죄와 악과 오만을 벗을 길 없는 육을 입고 사는 동안에 저들의 동기나 원인이 문제가 아니고 그 목적이나 양식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늘의 행동반경이었다(시 1:1-2).
말씀 앞에 앉아, 말씀밖에 다른 길은 없음을 깨닫는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 16:7).”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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