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느헤미야 12:43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시편 17:6
오늘 본문은 2차 귀환 후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각지에 흩어져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백성들을 지도하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느 12:43).” 이에 공통점은 즐거워하게 하신다는 데 있다.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린다. 창조주 하나님의 일이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그리할 수 있는 게 복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시 17:6).” 시인의 표현에서 우리 믿음의 정체가 드러난다. 곧 그리하시겠으므로 내가 그리한다.
이를 어찌 표현하면 좋을까? 가령 아이와 같이 있을 때 나는 종종 껄껄거리며 웃는다. 이는 저의 천진무구한 ‘엉뚱한 소리’ 때문이다. 그리 태평할 수가 없다. 다들 온전치 못한 소리로 듣기 일쑤지만 마치 어린아이의 웃음 앞에서는 모두가 무장해제당하는 것과 같다. 시인의 고백은 그 소리다. 하나님이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부르짖는다. 내 말에 귀 기울이시겠으므로 내가 아뢴다. 믿음이란 그리 되지도 않은 일을 그리 될 줄로 알고 그리 여기며 사는 일이다.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누구는 장애라 하고, 누구는 혀를 끌끌 찰 일이지만 나는 누구보다 저 아이가 부럽다. 때론 ‘잘 박힌 못’ 같다.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11).”
누가 목사가 되었는데 그 전에 박사가 되기 위해 10년을 공부했고, 그 이유가 ‘특별전형’으로 목사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고, 무슨 연구원으로 연금 연수를 다 채워 돈 걱정 없이(?) 목회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그가 무슨 책을 자비출판으로 내고 이를 토대로 어찌어찌 주의 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나는 위태로운 마음으로 읽었다. 그래서 저의 마음에는 자기 의나 자기 공로가 없을까? 벌써 화려한 이력이 한 몫 먹고 들어가는 저의 가르침이 온전하려나? 나는 순간 성경의 여러 인물을 꼽아 나름 저의 이력과 같이 자신이 다 준비되어 쓰임을 받는 경우를 살펴보았다. 퍼뜩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고, 다소의 사울이던 바울도 그때는 그의 지식으로 예수를 박해하던 삶을 살았던 게 아니었나? 그러니 또 그런 사람을 환호하는 무리가 소위 난다 긴다 하는 학벌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호기심으로든 긴장감으로든 열광하는 모양인데… 그런 이들이 성경은 어렵다고 하면서 ‘쉬운’ 성경을 찾아 읽는 셈이었으니! 시가 어렵다고 산문으로 풀어서 읽겠다는 소리 같아서, 나는 당최!!
난 잘 모르겠다. 그러는 훌륭한 지식인들의 신앙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고, 오히려 나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표현과 맹랑한 기도에서 한참씩 즐겁다. 이를 시인의 표현으로 되새긴다면,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오히려 주님은 우리의 염려를 주께 내어놓기를 기다리신다. 부디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막 7:33-34).” 말씀 앞에서는 오히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겠나? 나는 저에게 그리 말해주려다 그만두었다. 무서운 것은 자신들이 쌓은 것으로 좀체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겠으니, 먼저는 저축해 놓은 재물이고 다음은 그에 비례하는 학식이겠다. 그런 무리들과 어울려 믿음의 엘리트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셈이겠으니!
차라리 상한 심령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의중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주 앞에 그러할 수 있는 것은 학식도 오랜 경륜도 아닌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이었다. 참 희한하지?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34:18).”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이 눈에 들어온다. 워낙에 잘난 줄 아는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 상위 1%가 97%를 누린다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에서 상위권에 진입하려면 그렇기도 하겠다는 생각은 든다. 다들 큰 교회를 선호하고 요란한 경력과 이력을 무기처럼 손에 들고 세상과 견주려고 하는 것이었으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19-20).”
문제는 주의 택하심이 중요한 것이다. 난다 긴다 이름하는 이력이 아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그래서 아는 사람만 아는 맛이라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그 선한 마음을 주셔야 아는 일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것으로 주를 알아본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이 모두는 주가 하시는 일이지 사람이 요령껏 의도하고 계획하여 선수 치듯 앞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악을 버리고,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오직 주를 의뢰하는 일만이 복이 된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왜냐하면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곧 내가 아니라, 나는 다만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여서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오후 두 시, 아이가 처음으로 10분 전에 왔다. 자기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어린아이 같아서 공상에 사로잡힌다. 현재 소설을 쓰겠다는 것은 망상을 즐기겠다는 소리다. 상상은 현실을 딛고 망상은 허공을 짚는다. 그 차이는 엄연한 것이다. 글쓰기가 훈련 안 된 경우 설명에 치중하고 또는 진술에 의존한다. 묘사를 가장 어려워한다. 설명은 상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서 생각 없이도 나열이 가능하고, 진술은 감상에 따른 것이어서 자기감정에 끌려가면 된다. 그런데 묘사는 관찰이 필요하다. 관찰은 탐구가 있어야 하고 그러려니 시간도 더디고 효과도 미미한 것 같다. 아이에게 이를 설명하려다 같이 잠언을 읽었다. 읽고 한 구절을 잡아서 그 의미를 오래도록 곱씹게 하였다. 우리는 이 땅에 얽매이지 않는 자들이다. 아멘도 하지 않는 아이에게 나는 억척스럽게 기도부터 하고 시작하는 이유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 6:12).”
저 한 영혼, 내게 두시는 일이라.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 내가 아이를 박대할 수 없는 이유이고, 내 안에 두시는 알 수 없는 주의 마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말씀으로밖에는 답이 없어서, 아이가 싫어하는 내색을 해도 나는 기어코 말씀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자꾸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게 맞기는 맞는 일인지. 그럴 때 말씀은 또 내게 이르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그런 점에서 나의 이런저런 모양이 처량하기보다 감사하고 다행하다. 결국은 주께서 다투시는 세상이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시 35:1).”
내가 상대할 게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래서(?) 나는 무언중에 선생의 제안을 거절한 셈이 되었다. 그러자니 내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성경은 족한 줄 알게 하신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내가 주목받는 생이 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주께 피하여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시 17:7).” 이미 족하였다. 이는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8-9).”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10).”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이력을 들고 주 앞에 설 수 없다.
고로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13).” 이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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