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느헤미야 9:3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편 14:1
성전 재건이나 성벽 건축은 단순히 삶의 터전을 회복하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이는 죄악 된 삶을 깨뜨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일이다. 그러는 데 있어 하나님이 어찌 행하셨는가, 하는 것을 돌이켜 보며 묵상하는 일만큼 유익한 것도 없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분은 확연하여 지난날을 돌아볼 때 누구는 지겨울 따름이나 누구는 모든 게 은혜였다. 사는 동안 만족을 추구하며 살았으나 후회뿐인 삶이 있고, 묵묵히 준행한 것인데 감사한 것뿐인 경우도 있다. 돌아보면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1).” 하는 말씀이 내 것이다. 곧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그럼에도 오늘 시인은 어리석은 자의 특징을 구분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1).” 주를 바라며 사는 일이란 주님에 의해 사는 삶이다. 가령 나는 자꾸 저 아이를 밀어내는데 신기하게도 저 아이는 떨어져 나가지를 않는다. 그만해야지 나는 못 하겠다 싶은데도 또 보면 저 아이가 다가와 있다. 이와 반대로 가까이 하고 또 보면 저만치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서 희한하다 싶어서 다시 더 노력을 하는데도 늘 저만치에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아이와 같이 읽은 전도서에서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9:1).”
곧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일이어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이는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내가 잘 안다고 여길 때 그 거리는 도무지 좁혀지지 않고, 나는 할 수 없다 여겨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면 주께서 임의로 인도하시는 관계가 있었으니,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나의 가는 길을 지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8-9).”
아이를 대할 때 나는 그저 답답한 심정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나의 일이 되었다. 얘를 어쩌면 좋을까? 아픈 아이는 그렇다고 쳐도 스스로 정상이라 여기는 아이가 더 아픈 아이 같아서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둬야 할까? 뭐라 나무라야 할까? 하기 싫으니 관두자 할까? 야단을 치고 때려서라도 잡아줘야 할까? 나는 하도 답답하여 아이에게 물었다. 얘도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이려니, 하고 이해하고 또 보듬으려 해도 이건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사람을 여간 힘들게 하는 게 아니다. 아,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 내 맘대로 안 되니까 힘든 거였다. 내 맘 같지 않아서 그게 부대껴 힘이 드는 것이라, 무딘 도끼로는 나무를 빠개기는커녕 힘만 드는 일이었다.
아이가 돌아가고 가만히 주를 바란다. 어쩌면 나는 나의 선입견으로 아이를 위하고 주께 바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 13:55).” 그러니 온통 저 귀한 말씀 앞에서도 내가 아는 바로 이해하고 상식으로 접근하여 하는 것이다. 아,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44).” 감춰진 보화를 보지 못하고는 맹지 같은 저 아이에게서 나는 아무런 희망도 찾을 길이 없다. 도무지 기대할 게 없다. 아픈 아이면 차라리 더 참고 이해하고 견딜 텐데, 이건 꾀는 멀쩡해서 자기 할 말은 다 하고 하고 싶은 것은 결코 포기하지를 않으니, 뭐라 한들! 벽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곰 같다. 꿈쩍도 않는다. 두어 시간 같이 있다가 아이가 돌아가면 나는 진이 빠져 쓰러질 것 같다. 속상한 건지, 화가 나는 건지, 억지로 아이를 배웅하고 돌아설 때면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먼저 튀어나온다. 어쩌겠나? 내가 이 모양이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이 모순된 현상을 나는 감당할 길이 없다. 오히려 예전 같으면 그러든가 말든가 여기서 포기하고 말 일인데, 마음은 이상하게 저 혼자 신경 쓰이고 속상하고 답답해하는 일이어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그렇듯 문득 드는 생각이 그래서 그런가? 아이도 희한하다. 그쯤 밀어내면 제풀에 그만둘 것도 같은데 신기하게도 꾸역꾸역 다시 온다. 이는 늘 아내가 쓰는 표현이다. 쟤들이 왜 오는지 모르겠어! 자신이 하는 거에 비해 애들이 그만두지 않는 게 신기해서 하는 소리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다는 데 겸허해진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시 9:13).”
겨울 비 치고는 꽤 많은 양이 며칠째 내리고 있었다. 아내와 딸애가 감기로 고생하였고 나 또한 온 몸이 천근만근이라, 만사가 귀찮을 뿐인데도 그 비를 뚫고 아이가 온다. 마다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면 그게 더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 가운데 오늘 느헤미야서의 말씀은 다시금 말씀 앞에 앉히신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9:6).” 이 모두를 지우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때로는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내 안에 늘 드는 마음이었던가?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오늘 말씀이 나를 지명하시는 것 같다(17).
말씀으로 서자. 달리 방도가 없다. 내가 어찌 무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무리 선한 의도였다 해도 지나치면 그르치게 되어 있었으니, 내 맘 같지 않으면 나는 좌절하는 일이라.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과연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나? 마치 나는 좀 나은 줄 알고 우쭐하다보니 내가 저 애를 긍휼히 여기기보다 판단하고 비난하는 마음으로 업신여기는 게 아니겠나? 아,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6).” 주께 의뢰하자. 주님만 바라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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