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전봉석 2020. 1. 13. 07:05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에스더 1:12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4

 

 

에스더를 바사 왕의 왕비로 세우시는 데 있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모든 우연은 하나님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게 징검다리와 같다. 이를 말 그대로 우연으로 두면 더는 나아갈 수 없고, 그저 운으로 여기면 하나님의 세계를 가린다. 그러니까 왕후 와스디가 아하수에로 왕의 부름에 거역함이 결코 개인의 소행으로 그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말씀은 우둔한 자에게 지혜를 더하고 그 눈을 밝혀준다. 오늘 시편의 표현이 이를 상기시킨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19:7-8).” 즉 일련의 상황은 흥미로움 그 이상이다.

 

오늘 우리에게 펼쳐지는 일들도 그러하다. 이런저런 일이 때로는 이해의 폭을 넘어 그 다음 이야기를 가늠할 수 없게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래서 믿음이 있고, 믿음은 우리로 기도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넓혀간다. 기도를 통해 희생적인 섬김을 드러낸다. 이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씀이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5:9).” 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 그래서 바울의 목소리는 간곡한 것이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2).” 그러면서 강조하였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본래 그런 것이다. ‘육체의 일(19-21)’성령의 일(22-24)’은 엄연히 다르다.

 

그런 차원에서도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6:4).” 우리 손으로 일하기를 강조하고 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물론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6:5).” 이는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 이와 같은 착한 일, 선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 곧 이 일은 우리가 시작한 게 아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 시작하신 이가 있고 저는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2:6).” 이 모두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

 

이를 묵상하고 있다 보면 놀랍기만 하다. 돌아보면 모든 게 허투루 이루어진 일이 없다. 우리의 그릇됨조차도 선으로 바꾸어 일하시는 분에 의해 새로운 역사가 된다. 가령 요셉을 애굽에 팔았던 형들의 소행은 그릇되나 이를 통하여 저들을 구원하셨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이를 알고 누리고 그 일에 동참하는 일은 귀하다. 말씀을 따라가며 이와 같은 데 주목하고 묵상하는 까닭은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런저런 어려움이나 현실적인 문제들이 결코 그냥 문제로만 버려지는 게 아닌 것을 붙든다.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10).” 오래 참음으로 얻는 기쁨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16:22).” 이 기쁨은 내 것이 아니어서 빼앗길 리도 없다.

 

비록 늘 같은 날이 반복되는 것 같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일 같지만 가령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영국의 하원의원으로 1806년 노예무역선을 금지하는 데 무려 26년을 싸웠다. 이와 같은 일이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고 그 믿음의 초석은 기도였다는 데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금은 근심하나 이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언급하신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이는 우리로 변명함과 확정함에 흔들림이 없게 하려 하심이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1:7).”

 

아이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 누가 안 오고, 누가 같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야 늘 굴뚝같은 일이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담아 기도하고 생각한다. 더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으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아이 하나로 나는 무던히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 주의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을. 내가 주의 이름으로 아뢰는 누구에 대한 생각과 그 안타까움으로 부르는 이름 위에 주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실 것을. 나는 오늘 에스더의 등장에 앞서 그 배경을 정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묵상한다. 그 모든 일은 전우주적이고 비상식적이다. 우리의 이해가 감당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니다.

 

오후께 필리핀 어디서 43년 만에 화산재가 폭발하였다는 기사에 가슴이 철렁하였다. 앞서 이란이 어디 국적기의 민항기를 오인하여 폭파시켰다는 보도는 덤덤히 보다, 그곳에 아들애가 있고 그 근처가 가깝고 다음 주일이 온 가족이 설을 맞이하면서 방문할 거여서, 순간 불안이 또 염려가 밀려들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던 나라나 사람이나 어떤 일이 이제는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나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꾸 뉴스를 살피고 인터넷을 뒤져 상황을 찾아보고 좀 어떤지 아들애에게 카톡으로 물어보기도 하면서, 이러한 마음씀이 결국은 거기에 내 아이가 있게 때문이다. 가족들이 갈 곳이어서이다. 더는 별개의 일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의 심정이 그러하셨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17:24).”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이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어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12:28).” 그러므로 이를 예수님은 오늘 나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위한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17:26).” 곧 에스더를 왕비의 자리에 앉히는 일, 요셉을 바로의 총리로 삼으시는 일, 이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함이시다.’ 그렇다면 오늘 내게 두시는 이런저런 상황과 말 못할 어려움까지도 실은 다 주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이를 묵묵히 준행하게 하는 걸음이 결국은 믿음이었고 믿음으로 드려지는 기도의 힘이었다. 고로 주를 경외하게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9:9-10).” 결코 그 어느 것도 버려질 게 없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

 

이를 알게 하시는 주의 긍휼하심 앞에 잠잠히 맡기신 일에 충성하기를.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