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스더 4:16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편 22:24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표상(type)이다. 표상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예시다. 마치 앞날의 그림자다. 예고 같은 것이다. 성경의 모든 표상은 그리스도 예수께로 향한다. 그 이야기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현상일 수도 있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다짐은 다니엘의 친구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는 고백과 함께 유명하다. 이때를 위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세우셨다는 것을 저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14).” 모르드개는 왕후가 된 자신의 질녀인 에스더에게 그리 전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안녕을 도모할 법도 한데, 에스더도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먼저 합심하여 기도할 것을 당부한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 4:16).”
주를 의뢰하는 마음이 역력하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 결코 우리의 어려움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 때로 그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알 길이 없다 해도,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그럼에도, 어떠하든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의뢰하는 일이 기도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경우의 예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믿음으로 아멘, 하는 모든 경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우다.
아이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많고, 설을 맞으면서 겸사겸사 온 가족들이 필리핀을 다녀오기로 했는데 뜬금없이 탈화산이 분화하고 화산재가 뒤덮고 더 큰 폭발이 있을 것이라는 예보로 마음이 어려운 하루였다. 산책 겸 멀리까지 걸어서 병원에 들러 안정제를 받아왔다. 이런저런 생각만 많다. 그때마다 나는 주여, 하고 주의 이름을 되뇔 따름이다. 다들 안 갔으면 싶은데, 그게 어디 마음처럼 쉬운가? 아이는 유독 감정이 혼재된 하루였는가? 자주 카톡을 하고 엉뚱한 소리로 통화도 하면서, 병적인 아이의 상태나 돌아가는 이 땅의 염려와 근심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점점 더 약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 가는지, 사람들로 붐비는 대기실에 앉아 나는 어느 동남아 여성의 핏기 없는 얼굴을 움쳐보았다. 곁에는 어린 신랑인 것 같고 늙으신 시어머니인 것 같은데…. 다들 저마다의 사정과 사연으로 신음하는 것 같았다.
그렇듯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말씀하신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일련의 상황을 보면 우리는 늘 선택지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너는 어느 쪽이냐? 이에 여호수아는 강변하였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불현듯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으니,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도 그러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과연 어느 때까지 머뭇거릴 것인가?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영국의 희극배우이며 작가였던 버나드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찌할 것인가 물으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산다는 일은 운명처럼 갈림길에 늘 서는 것이다. 모세도 선택해야 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행 7:23).” 생각이 났다고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안위와 보장된 삶을 포기하는 일이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저는 장래가 확실한 위치였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22).”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물으신다.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를 겸할 수 있고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을 따로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이는 그만큼 영적으로 대단한 존재이던가, 스스로를 자부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모름지기 사람은 그리 대단하지 못하다. 마음은 조석으로 바뀌고 행동은 갈피를 잡을 길 없고,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게 사람이다. 누가 항변하든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할 때 나는 저를 경계한다. 옷감 장수 루디아는 선택해야 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또한 옥을 지키던 간수장은 선택해야 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31-32).”
하나님은 결코 강제하지 않으신다. 아담이 하와의 선택을 따른 것처럼 모세는 자기 백성을 돌볼 마음을 따랐다. 루디아는 말씀을 의지할 생각을 따랐고, 간수장은 저들을 도로 옥에 넣기보다 자신이 복음을 받아 주를 영접할 길을 따랐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넓은 문을 택할 것인지, 협착한 길로 갈 것인지, 넓은 길로 갈 것인지…. 하나님께 향하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든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기 그지없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오늘 말씀에서 에스더는 기로에 섰다.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것인지 민족의 아픔을 같이할 것인지, 모르드개는 일깨운다. ‘이때를 위해 너를 세우셨다.’ 이러할 때 우리는 돌아보아 깨닫고 결단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아보셨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눅 1:68).” 그 결과 오늘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버지라 외친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78).” 주의 긍휼하심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이를 믿거나 아니면 이를 거부하거나!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히 2:6).” 나 같은 게 뭐라고! 주께서 나를 그리 여기시고 위하시고 생각하시는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예수님은 선택하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왜 그렇게까지 하신 것일까? 왜 모세는 미래가 보장된 위치에서 백성을 돌볼 마음을 택한 것일까? 아브라함은 왜 다 늙은 나이에 ‘가라’ 하시는 막연한 말씀을 선택한 것일까? 왜 우리는 넓은 문, 넓은 길을 놔두고 좁은 문, 협착한 길을 선택하는 것일까? 시대가 어느 시댄데 아직도 그런 무모한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하는 말씀 앞에 다른 더 좋은 것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과 그 동등 됨을 버리고 낮고 천한 자리에서 죽어주시기까지, 그리 선택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모세도, 아브라함도, 믿음의 숱한 표징들이 예표 하는 바가 오로지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우리는 이제 택일해야 한다.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한다. 너는 어느 쪽이냐? 성경은 우리에게 선택지를 내미신다. 이는 결코 막연하지 않다.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간단명료하고 선명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그러므로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22:19).” 그러므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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