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전봉석 2020. 1. 18. 06:25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에스더 6:1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시편 24:3-4

 

 

극적인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 왕후 에스더가 잔치를 베푸는 그 날 밤에하필이면 왕이 잠이 오지 않았을까? 잠이 오지 않자 뜬금없게도 역대기를 가져다 읽었을까? 그 수많은 역대 일기 가운데 모르드개가 왕을 위하여 펼친 활약이 적힌 내용이었을까? 왕의 암살을 미연에 방지한 저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는 데서 왕은 흥미를 느끼고, 그 일을 지금이라도 되돌리려는 데 있어 마침 하만 장군이 뜰에 와서 있었을까? 왕이 묻되 그런 자에게 어찌 행할까? 하시니 하만은 그게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 여겨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하니라(8-9).”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지게 하시고 낮아진 자를 주께서 높이신다는 성경의 원리가 적중하였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11).” 하만은 유다인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그의 뜰에 장대를 준비하고 있던 이가 아니던가? 그런 그에게 그가 제시한 방식대로,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6:10).” 하는 명령을 내린다. 결국은 하만이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모르드개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되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니라(11).” 참 기이하고 기묘한 이 이야기를 묵상하다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절묘한 방식이 돋보인다. ‘그 날 밤에’, 또는 때가 이르매하나님은 그 때를 기다리셨고, 주의 시간 속에서 주의 방식대로 주의 장소에서 일을 추진하신다.

 

가령 모세만 해도 저는 40년이나 왕궁에 살며 여러 교육을 받고 전도유망한 장래를 보장 받고 있었는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4-26).”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하고 묵상하다보면 하나님의 일은 신통하고 묘하고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신묘막측할 따름이다. 스데반 집사도 이를 설교하였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7:20).” 이처럼 일이 되어지는 과정에서 놀라울 따름이다. 아무리 각각의 이야기가 따로 존립하는 것 같아도 그 이야기와 이야기가 서로 연관되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었으니, 모세의 출생이 우연한 게 아닌 것처럼 하필 그 날 밤에왕이 잠이 오지 않아 역대 일기를 가져다 읽었는데 그 내용이 모르드개의 이야기였고, 그 순간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및 유다 사람들이 기도로 준비하고 있던 일이 있었으니모든 게 놀라울밖에!

 

이 모든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 아래 놓였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의 일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일을 추진하신다. 그 때와 시를 우리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가장 선하게 인도하신다. 실은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하는 데 있어 나는 늘 부끄럽기 그지없다. 불안이 병적인 사람이라 나 또한 주체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이번 주일 오후에 가족들이 모두 필리핀에 가야 하는데 일련의 탈화산의 폭발로 날린 화산재와 앞으로 있을지 모를 여러 징후로 인하여 나는 자꾸 겁이 났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고, 공연히 마음이 쓰여 연신 올라오는 그와 관련한 기사를 찾아보며 혼자 근심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내게 오늘 아침의 말씀은 꾸짖음 같고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마주하게 하시는 대목인 것 같다. 나는 그저 당장의 표면적인 일에 두려워할 따름인데 그 배후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추진하고 계신 것일까? 그럴 때 우리가 다른 점은 돌아보게 하시는 거였다. 막연히 두려워하거나 근심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어찌 관여하시고 이루어 가시려는가? 하는 대목에서 집중하게 하신다.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2:6).” 주가 어찌 돌보시는지 알게 하시려고, 주께서 직접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이 땅에 오셨던 게 아닌가?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7).” 그런 가운데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다니!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9).”

 

오후께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고, 주보를 만들고 그러는 동안 마음은 싱숭생숭 염려에 눌려 있을 때 우리 구주 예수께서 그렇게 세상에 오시게 된 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그리고 이처럼 아침에 깨우시더니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주의 뜻을 바라던 모르드개을 일으켜 세워 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하시는 것이다.

 

가정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어느 아이가 벌써 중학생이 되는데 그 지능은 부진하기 이를 데 없고, 새로 온 아이의 자폐증상은 똥을 싸고 혼잣말을 하고 지나치게 애착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일에 대하여또 누구는하면서 이어지는 우리 곁에 보내시는 아이들 하나하나에 대해 우리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일부러 끌어 모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까지 대놓고 우리가 무얼 추진하려는 일도 아니어서 그저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아내의 말을 듣다보면 또는 내 곁에 두시는 아이나 그의 하루를 돌아보다보면 때로는 하나님이 대체 무슨 일을 하려 하시는지 알 길이 없다. 병적이니까, 가정이 그러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없는 이야기와 이야기가 서로 파동을 일으키며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주를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신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

 

모든 일의 배후와 그 이야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신다. 하만은 승승장구하여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다. 왕의 말을 자신을 떠보는 말로 들어서 한껏 능청을 떨었던 것인데 그 영광과 존귀가 눈엣가시로 여겨 곧 장대에 달아 죽이려 하던 모르드개에게로 돌아가다니! 이러한 말씀 앞에서 나도 전에는 어떠하였는지를 돌아보며 자복하게 하신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이를 묵상할 때마다 내게 더하시는 주의 은혜가 참으로 크고 귀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 그러므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 누구를 걱정하고 염려하며 저의 행적을 나무라고 탓하다가도 내가 더 괴수였다는 데서 주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린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속은 끓고 마음은 염려로 가득하여 병적으로 불안해하며 안정제를 의존하며 사는 불쌍한 사람이겠으나 나는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의 놀라운 사랑과 섭리 앞에 엎드린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24:3-4).” 항상 보면 시편의 고백이 내 것이 된다. 누군들 주 앞에 설 자인가? 곧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시려고, 나의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게 하시려고 오늘에 두신 나의 연약함과 병적인 요소들을 사랑한다.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을 어루만진다. 금세 돈을 주머니에 넣고도 잃어버린 줄 알고, 아침에 와서 뭘 먹고 왔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횡설수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아이의 글을 소리내어 읽고, 감정이 고조되어 사랑한다는 말을 연발하다 또는 까부라져 나락 끝까지 이르러 우울해하는 아이에게,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5-6).” 어찌 이를 확신할 수 있겠나? 나는 나를 믿지 못하고, 아이의 장래를 알지 못하며, 현실에서 버벅거리며 평균도 따라가질 못하는 아이들에게, 우리까지 저들을 부진아로 문제아로 치부하며 걱정부터 할 게 아닌 것이다. 종종 아내에게도 말하길, 그러그러하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우리에게 왔겠나? 똑똑하고 온전하다는 아이들이 우리에게 와서 배우려고 하겠나? 나름 난다 긴다 하는 엄마들이면 이 보잘것없는 공부방에 또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글방 교회에 보내겠나? 것도 고작 나 같은 사람에게!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그렇겠다! 그래서 우리처럼 약한 것을 들어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없는 것들을 들어 있는 것들을 무릎 꿇게 하시려고, 못난 나를 들어 잘난 줄 아는 것들을 우러러보게 하시려고! 그 영광의 실체와 존귀의 값은 주께 있음을!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24:1).” 다 주의 것이다! 나의 모자람도 연약함과 어리석음까지도,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2).” 비로소 주의 영광의 날에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7-8).” 주가 이끄시고 행하시는 일이었다. 내가 무얼 주관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9,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