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전봉석 2020. 1. 19. 06:43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에스더 7:10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25:14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결국 하만이 장대에 달렸다. 이를 오늘 시편의 표현대로 하면,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25:8).” 그러니 사람 참, 그 길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10).” 묵묵히 주를 바라보며 간다는 것은 상 주실 이를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 곧 여기가 전부가 아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고,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무던함이 곧 복이었다.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오는 친구가 연일 야근으로 인해 못 오게 되었다. 마침 아이가 그냥 집에 있다고 해서 오라 하였다. 평소대로 일기를 쓰고 같이 성경을 필사하고 점심을 먹었다. 아내와 딸애는 모처럼 쉬는 하루여서 될 수 있으면 늘어지게 자고 싶다고 하여서 그리하였다. 보면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의 신세가 내 것과 같았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말고가 아니라 그럼에도 묵묵히 오란다고 오고, 하란다고 하는 그의 순종이 안타까우면서도 소중하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동물도 아니다. 느끼고 깨달아 자기 역할을 한다. 그런데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1:22).” 세상이 온통 자신들 생각대로 굴러가는 줄 안다. 그런 점에서도 나나 아이나 우리의 무던함이 곧 복이었다. 그럴 수 있다는 게 말이다.

 

이를 막는 사람들의 행태는 나름 잘났다고 여기고 자기 계획에 사로잡혀 뜻을 이루려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8-19).” 정작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나 다들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 잘 안다. 그런 자들이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도 자기 방식대로 안다고 한다. 먼저 저들은 허망한 것을 좇는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4:17).”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18).” 이를 알게 하여도 알 리 없다.

 

아이는 글을 쓰고 나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 강해집을 읽었다. 내버려둘까 하다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불러 하다못해 같이 점심을 먹었다. 아이의 그런저런 상황이나 마음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같이 하는 시간이 저들 가족에게 조금은 전달이 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물론 다들 피곤하겠으나 형은 형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그냥 늘어져 있기보다 아이와 같이 할 수 있는 무엇을 좀 도모하면 어떨까싶어서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그러느니 자꾸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하긴 또 그 곁에서 늘 같이 사는 가족의 입장은 또 다를 수 있으니까. 나는 아이를 힐끔거리며 그 외로움을 짐작하였다. 이를 주께 아뢸밖에.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25:16).”

 

그저 가족이 없다고 외로운 게 아니고 가족이 있다고 외롭지 않은 게 아니다. 사람은 본디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까지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안고 산다. 이를 영적으로 분변하는 게 복이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종종 자신의 것을 더욱 크게 여겨 비관하고 낙심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럴 거 없다. 돌아보면 있어서 힘들거나 없어서 힘들거나 삶은 모두 힘들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고 사람들이 저마다 으르렁거리며 진탕하게 싸울 따름이다. 저마다 자기주장을 하면서 말이다. 누가 같이 하던 당을 박차고 나오고 누가 뒤돌아서 욕지거리를 해대고, 이를 보며 다른 진영에서 또 욕하고 저마다 진영논리에 빠지는 일처럼 끝이 없다.

 

그러할 때 나는 아이를 보면서 아이의 무던함을 사랑하였다. 모자라고 부족하고 장애가 있고 어디 문제가 있다고 하나 그것이 오히려 복인 것이다. 이런 게 무슨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1:9).”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저마다 다를 게 없다. 있는 것들이나 많이 배운 것들은 자신들의 것으로 허덕거리는 것이고, 없는 것들이나 못 배운 것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으로 빌빌거리는 것이어서,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세상살이와 별개의 것이 지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4:20).” 능력이란 주어진 형편과 사정이 어떠하든 무던할 수 있는 힘이다. 묵묵히 주어진 일에 성실할 수 있는 것.

 

아이가 온다고 할 때 나는 그게 기특하였다. 다들 무슨 일로 미루거나 또는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게 마땅하지만 우리는 그저 묵묵히 하던 일을 주어진 자리에서 그 여건에 따라 준행하는 것뿐이다. 뭐라 한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다 해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우리는 은혜로 산다. 우리 실력으로 사는 게 아니다. 우리 노력과 그 애씀으로 이루어가는 게 구원이 아니다. 토요일에 아이를 오라하고, 온 아이를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 하던 대로 하는 게 복이구나! 말씀 붙들고 말씀에서 사는 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8:30).” 그 말씀에 거하는 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1-32).” 그런 거 보면 아이와 있을 때 가장 호탕하게 웃기도 하고 장난도 걸고 천진무구해지는 것을 느낀다. 꿍꿍이가 없기 때문이다. 서로 눈치 보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의 의문은 끝나지 않는다. 자신들이 아는 지식으로 인함이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33).”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금 자유를 강조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34-36).” 더는 우리가 세상에 종노릇할 게 아니다.

 

저들처럼 연연하며 살 일도 아니다. 그걸 헐뜯듯 장애를 운운하고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대해 자신들은 우월한 줄 여기며 살겠으나 그것이 다 헛된 것은 사람이 그렇게 대단하지 못하다. 우리도 영락없이 바람에 나는 겨와 다를 게 없다. 다만 우리의 차이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오늘 기어이 모드르개를 달아 자신의 위신을 과시하려 했던 하만의 실체가 드러났다. 저의 결과는 자명한 것이어서 그리 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한 내용 앞에서 시인은 기도를 가르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25:15).” 그러므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21).” 주어진 것에 묵묵히 감사하고 무던히 순종하며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