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월 곧 열두째 달 십삼일은 왕의 어명을 시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
에스더 9:1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편 27:14
아달월 13일은 하만이 바사 전역의 유다인을 진멸하려 하던 날인데, 도리어 그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들을 도륙하고 선민으로서의 연대의식을 고취하며 부림절로 지키게 된다. “아달월 곧 열두째 달 십삼일은 왕의 어명을 시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에 9:1).”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고, 이미 끝났어도 끝난 게 아닌 것이다. 결국 모든 역사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드러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신학자이며 목사인 해리 에머슨 포스터는 이 모든 게 우리 손에 달렸다고 역설하였다. 즉 영원한 것에 대한 공명하고 열린 마음이 우리를 영적인 사람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얼핏 들으면 옳은 소리 같다. 나의 선생이나 주변에 좀 공부를 한 사람들이 우리의 믿음에 대해 그리 떠벌이는 것을 종종 듣는다. 하나님은 한낱 피로한 머리를 기댈 베개로 여기지 말라는 소리다. 그럴듯하다. 그리하여 열심을 강조하고 사람의 성실을 운운하며 주도적인 자기계발을 독려하는 데 있어 결단을 끌어들여 복음으로 둔갑시킨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듣다보면 이보다 더 좋은 교훈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7:30).” 우리더러 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돌보시고 속량하신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눅 1:68).”
그럼 어째서 저들은 그리 주장하는가봤더니 저들이 가진 게 많다. 배운 게 좀 된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다. 그래서 에밀 쿠에는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모든 면에서 좋아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성경은 가난해져야 한다고 일깨우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이를 사람들은 마음이 그렇다는 것으로 느낌으로 그리 욕심 없이 살면 된다고 하는 소리로 이해한다. 하지만 누가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있는 그대로 가난한 게 복이다. 남들보다 못한 게 복이다. 장애가 복이고 슬픔과 괴로움이 복이다. 그럴 수 있다. 그것으로 주를 부르고 주로 갈급해하는 것이다. 실제 부자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인해 덜 아쉽다. 아픈 데가 없고 크게 슬프고 괴로운 게 없으니 가난이란 그저 추상적인 개념으로 다가올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선으로 여긴다. 보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누구보다 좀 낫다고 여기고 스스로는 나름 한다고 하는 것으로 주 앞에서도 할 말이 많다.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드러낼 게 있다. 바리새인들이다. 그러나 세리와 같이 성전에서조차 멀찍이 떨어져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개도 들지 못하는, 가난이란 이와 같이 주 없이는 안 된다는 절대적인 의존이다. 그런 자의 마음에는 천국이 있다.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다. 그 심령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는 소리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을 우리 안에 두셨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곧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이 땅에서의 보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의는 하나님의 기쁨을 바란다. 다른 그 무엇도 앞설 수 없다. 평강은 그 어떤 대체물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식도 아내도 수입과 그 어떤 보상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저 예수만으로 만족하는 희락이다.
가난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가난으로 인해 그렇다는 것이다. 가령 아이의 장애가 그 엄마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여 주만 의지하게 한다. 누구의 질병이 또는 실패가 저를 좌절하게 하는 것 같으나 그것으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천국이다. 실질적으로 돈이 없고 병들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부자이면서 배운 게 많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대와 존경을 받는 사람보다 용이하다. 이는 사회적으로 또는 구조적으로 그런 처지에 놓은 자들의 복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고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보면 그런 자들에 의해 복음이 이어졌고, 한국 교회의 부흥도 엄연하게 가난하고 고통 가운데 처한 상황에서 활발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 실제 저들이 가지고 나름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사는 것이 그처럼 훼방한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24).”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병약하고 슬프고 괴로움 중에 사는 자들이 그 마음에는 천국을 품고 산다. 실제 연구에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았고 미국이 43위였다고 하니.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 그래서 여기다 저기다 다들 천국을 찾아다니지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6).”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우리는 가끔 그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우리가 저를 택한 것이 아니라 저가 우리를 택하셨고 부르셨다. 이를 어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구를 설득시킬 수 있을까?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나는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꾸만 슬퍼진다. 저의 마음은 알겠는데 그것을 또 말려야 하는 심정도 이해가 간다.
가령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아이는 누구에게 무얼 부탁하거나 어떤 문제를 말하자면 저들은 ‘아픈 아이’의 말로 받고 시비가 붙는다. 그러니 아이엄마는 연락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가지 마라, 하는 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아이는 억울하고 분할 따름이다. 나이가 들어 이성에 대한 마음도 생기고, ‘남들처럼’ 그 젊음을 만끽하고 싶은 욕구도 일고, 말 같지도 않겠지만 나름의 계획도 꿈도 미래도 있는 것인데… 그 수준이 병적으로 어린아이 같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부모의 손길이 필요하고 누군가의 개입이 요구되는 상황이라. 오죽하니 장애인 복지단체에서도 아이를 보내지 마시라 했을까. 전날에 어디 큰 교회 청년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듣다가 그러니 나도 그 아이 엄마처럼 가지 마라, 어울리지 마라, 나서지 마라, 할 수도 없고… 얘기하다보면 속상하고 답답한데, 마음의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이었으니! 심령이 가난함으로 천국이 내 것이 된다. 그리고 훗날 우리는 주 앞에 선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는 두려운 일이나 이것이 우리로 간절함을 더한다. 심판은 억울한 자의 마지막 남은 보루다.
복음이 능력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그래서 누구에게는 거슬리고 누구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겠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이 손수 행하신다. 그러므로 오늘 시인의 표현으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 막막하고 암담할밖에 다른 대안이 없는 아이 앞에서 또는 어떤 일을 두고,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 가난이니 질병이니 어떤 실패나 남들의 질시와 멸시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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