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전봉석 2020. 1. 23. 07:12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기 1:5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29:11

 

 

나름 믿음 안에서 성심을 다해 산다고 사는데, 이런 일이 터지면 것도 참 암담한 노릇이다. 성경에서 욥의 이야기만큼 실질적이면서도 껄끄러운 부분은 없는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싶을 때 우리는 좌절한다. 욥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1:5).” 나름 정말 성실하였고 열심이었고 하나님 앞에 온전하기를 힘쓰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닥치는 일을 읽다보면 순간 얼음이 된다. 갑자기 온 재산을 잃고 심지어는 자식들 열을 한꺼번에 잃었으니 저에게 닥친 일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욥의 결기는 대단하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20-21).” 저는 의식적으로 무장하고 실제 삶으로도 무장하여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2).” 참으로 합격점의 사람이다. 스스로 이와 같을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일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누가 전화를 하여 무슨 일을 앞두고 마음이 어려운가보았다. 또 우리 아이는 아무 이유도 없이 더 심하게 불안을 느끼면서 다른 병원에를 가봐야 하나? 하고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전 주에 나도 정기적으로 약을 타러 갔을 때 명절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가? 대기실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다들 불안에 떨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어 다른 선생에게 얼른 약만 받아서 왔다.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가? 그런 걸 마치 대단히 강한 것으로 여겨 할 수 있다를 남발하며 스스로도 의를 구하고 선을 행하며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처럼 독려한다. 그렇게 자식들을 키우고 자신을 몰아세워 세상에 내어놓는데 실제는 얼마나 다른가? 누구는 안으로 감겨 우리처럼 안정제를 먹어야 할 정도이고, 누구는 밖으로 뻗쳐 공격적으로 산다. 누가 더 강한지 또는 약한지 나는 판단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아이에게도 일렀다. 마치 어떤 날, 바람이 세게 부는 것과 같다. 마음의 파동이 어떤 날은 유난히 출렁거리고 어떤 날은 잔잔하니 바람 한 점 없을 때도 있다. 힘들 땐 약도 먹고 좀 쉬기도 하고, 그러면서 괜찮을 땐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며 새로운 일을 시도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스스로를 다그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외려 누구는 그래서 기 치료를 받으러 가기도 하고, 어디 무속인을 찾거나 미신적인 행위도 해본다. 그것은 당장의 여파를 어떻게든 모면하려 하다보면 어김없이 그릇된 길로 가게 돼 있다. 그러다 누구는 들어앉아 은둔형외톨이가 되고, 누구는 자신을 강하게 몰아세워 거뜬히 이겨낸 듯 살다 한 번에 꺾이기도 한다. 이 모두는 스스로의 수고와 노력에 의한 결과다. 나는 기꺼이 받아들임을 권한다. 그럴 수 있고,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여전하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게 아니다. 그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사람이 되셨고, 대신 죽어주시기까지 말이다. 그러하신 분이 오늘의 나를 모르실까? 외면하고 방기하시는 것일까? 스스로 생각을 몰고 가는 일은 엄밀하게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적이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하는 자세다. 어떠하든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는 오늘 욥의 고백은 참으로 귀하다. 설령 그것이 아직까지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른 선을 추구하고 의를 갈망하는 마음이었다 해도, 기본적으로 우리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 이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셈이다. 누가 있었다. 저는 우울증에 불안이 겹쳐 몹시 힘들어했다. 정신과 여러 곳을 전전긍긍하고 옮겼고, 약을 여러 개 새로 받아서 복용해보았고,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며 상담도 하였다. 효과가 미미하자 저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택했다. 한 시간에 십만 원 하는 무슨 우주의 기 치료를 위해 삼각 테이블 위에 앉아 명상도 하였고, 어느 무속인을 만나 전생을 운운하며 막힌 기운을 없앨 수 있는 무슨 부적도 비싼 값에 구했다.

 

그때는 나도 심한 때였고 울면서 신대원을 공부하고 있을 때여서 저는 내게 그 비용을 자신이 부담할 테니 같이 치료를 받으러 가자고 마음을 써주었다. 아무리 그래도아닌 건 아닌 거다. 그렇게까지 해서 나을 일이면 그냥 앓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주의 길을 가겠다며 신학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니 나의 결기도 나름 욥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죽겠지만 까짓것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이었다.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고, 그때는 그래도 낫게 해주시려니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웬걸? 간신히 신대원 과정을 3년 마치고 목사고시를 보는데 두 번의 낙방이 어이없었다. 것도 평생 논술 선생으로 살던 사람이 논술에서 떨어지고, 다른 한 번은 새로 도입된 인성검사에서 떨어졌으니 그 실의와 낙심은 또 오죽했던가? 그래도 계속 할래? 이 길이 맞을까? 그저 현실도피의 하나는 아닐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장 친한 친구의 동생이 위암에 걸려 투병하다 하필이면 글방 근처 병원 호스피스 병동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동안 몇 번 통화로 문자로 위로하다 지척으로 왔으니 안 가볼 수가 있나? 나는 평소보다 두 배 이상 안정제를 먹고 저의 병실을 찾았고 아니나 다를까 저의 몰골을 보고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불안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늘 두 갈래 길이었던 것 같다. 도망치듯 회피하던가,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버티던가!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냥 한 번 문병 정도 다녀오는 것으로 그칠 일이었는데, 말이 길어졌고 나는 매일 아침 글방에 가는 길에 들러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로마서를 같이 읽으며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저에게 들려주는 말이 고스란히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왔고, 나는 영광스럽게도 저의 마지막 임종을 지키는 예비 목사가 되었다. 그런 일을 돌아보면 그래서 오늘은 좀 나아졌는가? 여전한데, 나의 그 여전함으로 그리스도의 권능을 담는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를 아이에게 또는 누구에게 들려주며 우리의 가난과 연약함으로 우리는 천국을 산다고 말해주고 싶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5:3).” 결국 우리의 가난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특등의 자리다. 아이가 어쩌다 공황을 앓게 됐나, 누가 왜 또 마음이 어려워져 힘들어하나, 그래서 누구는 또 어디 휴양림을 찾고 휴식을 운운하며 별의 별 걸 다 끌어다 해본다. 나는 그저 감사히 여김으로 좀 더 힘든 날이면 좀 더 약을 먹고 안정을 취하면서, 힘들어서 오는 아이나 아파서 힘들어하는 이를 마주하며 주의 사랑으로 위로한다. 여기서 주의 사랑은 나의 의의 하나님의 그 사랑이다. 물론 힘들고 안타까워 속상하고 답답하여 눈물짓기도 하지만, 그래서 또 주를 바라며 위하고 의뢰한다. 우리는 모두 사람으로 사는 날 동안 힘들다. 힘들지 않은 인생은 없고 저마다 무장하고 철저히 자기관리를 한다고 하지만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29:1).”

 

자기 힘으로 이겨내겠다고 하면 그러는 동안은 자기가 죽을 맛이다. 별 수 있겠나? 그런데 나는 나의 죽을 맛을 굳이 내가 맛보지 않아도 된다. 그럴 때면 주께 맡긴다. 의뢰다. 힘들면 약 먹고 더 힘들면 약을 더 먹어도 된다. 도저히 안 되겠으면 병원에 입원하든가 아니면 평생을 누워 운신도 못하는 신세로 지낸다던가. 그게 어떠하든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있었으니,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2).” 나는 이제 확신하는 바가 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건강하고 모든 일이 순탄하여 형통한 삶을 산다고 해서 복이 아니고, 나처럼 늘 빌빌거리며 빙충맞게 굴며 산다고 해서 불행한 게 아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강론한 게 아닐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7:13).” 이게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면, 우리는 다만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믿음이란 그래서 무모한 것 같으나 무모한 만큼 주를 더욱 바라는 일이다.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16-17).” 오늘 욥의 모습은 너무도 훌륭하지만 또한 너무도 지나치게여겨진다. 다만 나는,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이 모든 일, 불안이 켜켜이 덧대져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에 겨워할 때도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29:3).”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