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전봉석 2020. 1. 24. 06:47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기 2:10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5

 

 

보다 못해 그의 처도 저주하고 떠났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9).” 그의 친구들도 더는 가까이 오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13).” 그럼에도 욥의 진술은 아름답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10).” 참으로 놀라운 자세다. 다윗도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갈 때 따라오며 조롱하는 시므이를 대하며 그리 진술하였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 16:10).” 주가 그리 하심이라! 하나님이 복도 주셨듯이 화도 주신다! 어떠하든 주를 신뢰하고 의뢰하는 일이다.

 

아이의 묵상 글에서 전날에 힘들었던 내용을 읽었다. 마음이 어려워 잠자리를 뒤척거리다 깼다.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아이의 글 아래에 댓글로 남겼다. 때론 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욥이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의인이라! 그런데 누구의 말처럼 그가 그럴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인가? 우리는 당면한 문제 앞에서 난감하다.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5:8).” 문득 요나가 생각난다. 저는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에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다. 자기 생각에 니느웨는 이미 가망이 없는데 그런 데 가서 심판을 선포하라고 하시니, 하나님의 생각이 아무래도 부당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1:3).”

 

도망치듯 우리는 주어진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든다. 나는 아이에게 차라리 안정제를 먹고 그 순간을 마주해보라고 일렀다. 한 번 피하면 자꾸 피하고 싶어진다. 거듭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은둔형외톨이가 된다. ‘니느웨로 갈 바엔 다시스로 가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스에 대한 환상은 니느웨에 대한 반감으로 빚어진 궁여지책이다. 그런데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4:12).” 마치 연단은 쓸 만한 재목감을 가지고 하는 일과 같다. 마치 아비가 그의 사랑하는 자식을 꾸짖는 것과 같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12:5).” 말씀은 오늘의 상황에서 뚜렷하게 이르신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4:13).” 우리는 저마다 목적이 있는 삶이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4).” 외려 오늘 우리의 어려움은 우리로 참된 것을 하게 한다. 단순히 그냥 생겨난 일은 없다.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성령이 우리를 주도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자라가게 하신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 나는 아이의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이 속상하고 답답하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아이에게 강력히 전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욥과 같이, 다윗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의뢰와 굳건한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두 시에 오는 아이가 세 시에 왔다. 병원에 들렀다가 오느라 그랬다는데, 나는 언제라도 그만둘 사람처럼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얘는 자꾸 신기하다. 밀어내도 다시 오고 마음을 접으려하면 다가온다. 같이 기도를 할 때 아멘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짓말처럼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러니 아예 안 하려는 게 아니라 아이도 아이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고 저러는 게 분명하였다. 자기가 자기를 이기지를 못하는 것이다. 물론 아이는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한다. 내키는 대로 하루를 보낸다. 그러는 자신이 싫지 않은 것이다. 어쩔 땐 아주 교묘하게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내가 자신을 끊을 수 없도록,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그래도 어제는 좋았던 게 기도를 하고 아이와 같이 주기도문으로 마쳤다.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 인생의 풍랑은 때로 유익하다. 풍랑은 우리의 무익함을 상기시킨다.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자각시킨다. 한껏 내가 좀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주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일깨운다. 성숙한 영성은 풍랑에서 얻어진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4:37).” 안이할 때 풍랑은 유익이다.

 

그곳에 주님이 함께 계신 것을 뒤늦게 깨닫게 한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38).” 그런 상황에 잠이 든 예수님의 모습은 역설적이다. 풍랑을 주도하신다. 오늘 욥기서에서 하나님이 사탄을 주관하심을 떠오른다. 저도 주의 쓰임에 두는 존재일 뿐이다. 선과 악으로 나누듯 하나님과 견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할 때,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39).” 주가 내 안에 계신 것과 내가 주의 안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어떤 날은 유난히 바람이 세다. 아침에 오는 아이의 어떤 모습이 나를 긴장하게 한다. 설사가 나고 열 시도 안 돼 안정제를 서둘러 삼켜야 할 때도 있다. 가슴이 벌렁거려 그만 빨리 돌려보내고만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호들갑을 떨 수는 없다. 그러려니 하고 이제는 보란 듯 안정제를 삼킨다. 그래도 진정이 안 되면, ‘될 대로 되라하는 심정으로 나자빠진다.

 

주가 하시는 일이다. 요나의 물고기 뱃속은 그런 자리다. 제자들의 풍랑 위의 뱃길도, 다윗의 먼지 날리는 도망자 신세도 그런 자리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을 일깨운다. 특히 어제는 두 시에 오는 아이로 인해 나는 놀라웠다. 도대체 이럴 거면서 왜 오지? 나는 이런 애를 어쩌자고 계속 마주하는 거야? 오늘은 그만 둔다 그래야지, 더는 오지 말라고 해야지, 하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아주 미미하게 조금씩 조금씩 아이가 아멘을 하더니 주기도문을 외웠다. 같이 성경을 읽고 그 가운데 두 구절을 짚어서 마음에 와 닿는다며 이야기를 끌어갔다. 다시스로 도망쳐봐야 소용이 없다. 다시스에 대한 환상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따름이다. 예수님께도 시험은 찾아왔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4:1).” 예수님은 이를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으셨다(2-11). 오히려 마귀를 굴복시키셨다.

 

그 무기는 오직 말씀으로다. 굶주림으로 시험할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 앞날의 명성을 두고 시험할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7).” 그리고 영광을 보장할 때,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9-10).” 이처럼 우리도 날마다 사탄을 마주한다. 이래도 할래? 하고 두 시 아이가 어처구니없게 약속을 하찮게 여긴다.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야! 하고 아침에 오는 아이는 맥락 없는 답변과 엉뚱한 고집으로 또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그래도 이 길을 계속 갈래? 하고 사탄은 묻는 것 같다.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오는 친구가 잡채 먹고 싶어요!’ 하는 카톡을 보내왔을 때 순간 불쾌한 감정도 그런 식으로 나를 다그쳤다. 보자보자 하니까 나를 우습게 여기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찌 해야 할까?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어려움은 잠깐이다. 그 목적도 뚜렷하다. 영생과 일생은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30:5).” 시편의 기도는 언제나 축약적이다. 함의가 있다. 곱씹을수록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신다. 저녁에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잡채가 먹고 싶대! 하고 퉁명스럽게 또는 미안하게 말했더니 아내는 밝은 목소리로 전이랑 잡채 해줄게. 토요일에 성경공부하면서 먹어!’ 하는 것이다. 순간 나는 머쓱해졌다. 설날 당일, 아내와 딸애는 외가에 가고 나는 평소대로 토요일에 오는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기로 했다. 같이 복지관 출신의 아이들이 오면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노염은 잠깐이고 은총은 평생이다! 우리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

 

그리하셨고 그리하신다. 그리하시려고 내 곁에 누구를, 아이를 보내신다. 그러므로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2).” 나로 하여금 감사의 자리로 이끄신다. 주의 노염이 나의 찬양의 자리가 된다. 우리로 주께 경배하는 자리가 되게 하신다. 이에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1).” 그러므로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4).” 결코 우리의 원수는 우리를 이길 수 없다. 반드시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