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욥기 24:1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시편 52:9
가끔은 왜 하나님이 하나님 하시는 일을 감추어놓으셨는가, 하고 알 길이 없어 답답할 때가 있다. 즉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합 3:4).”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곧 우리에게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은 주의 뜻이다. 기껏 열심을 다해 박사학위를 땄더니 그 신세가 처량하게 되어 혹시 자신이 명예나 그에 따른 지적 허영에 의해 고집부린 게 아닌가, 하고 누가 힘들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하지만 그게 정작 어디까지 진실한지 자신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승승장구하여 더더욱 잘 사는 것만 같으니,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욥 24:1).” 욥의 한탄이 과장은 아니다.
그러할 때 시인의 독백은 우리로 중심을 잡게 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 52:9).” 그럼에도 주는 선하시고 그러므로 성도들 앞에서 주의 이름을 사모하겠다. 출근길에 저의 전화를 받고 성경의 여러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누구라도 순탄하였는가보면 저들 앞에는 주의 이름뿐이었다고 말해주었다. 기껏 얻은 시간강사 자리를 걷어차고 돌아와 하루 종일 울었다는 저의 말에 마음이 아팠다. 죽어라하고 했는데, 이러려고 박사까지 공부하게 하셨나싶은 마음이어서…. 그럼에도 당장은 감추어진 것 같은 하나님의 뜻이 곧 드러날 때가 온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괜히 감정적으로 대처할 일이 아니다. 하루 운 것으로 족하니 훌훌 털어내고 지금 네게 맡기신 일을 해라, 하고 말해주었다. 설령 박사까지 딴 것이 헛되어 자신의 허영 때문이었다 해도 이를 선으로 바꾸실 이가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신뢰하자.
바울도 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는 하나 저의 학식이 저로 변증하게 하였다. 모세도 궁정에서의 리더십훈련이 미디안 광야의 생에서 모두 헛된 것이 되어버린 것 같으나 훗날에 이를 들어 거대한 민족을 이끌어내는 데에 발판이 되게 하셨다. 곧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버려질 게 없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당장은 서럽고 억울하고 자괴감도 들겠으나, 그럴 때 전날에처럼 술잔을 기울이며 위로를 삼을 것인지, 의연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선하심을 의뢰할 것인지. 점심나절에 누구와 통화를 하다 삶에 대한 애착과 돈에 대한 욕심을 감출 수 없어 하는 저를 위해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다.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오면 시편 39편의 말씀으로 같이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나는 종종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말씀으로 이끄시는 주의 손길을 체험한다. 내게는 줄 수 있는 은과 금은 없다.).
때는 다윗이 늙어 병들었던가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한 사람이 사는 동안 자기 생각, 자기 고집을 꺾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애도 어른도 다르지 않다. 나이 들면서 제풀에 꺾이는 경우도 있겠으나 그래서 더 완고해지고 말이 많아지는 경향도 있다. 다윗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먼저는 말의 무게를 깨달았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1).” 말이란 참 희한한 것이다. 생각으로는 생각을 이룰 수 없고 말로는 말을 감당할 수 없는 법이다. 더욱이 남의 일을 말할 때는 말이야 청산유수 같아서 다 옳은 말만 하며 살 수도 있다. 특히나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은 물론이고 훈수 두기 좋아하는 논객들의 말의 향연이 시작된다. 나는 누가 좋았다가 뻔지르르한 말 때문에 슬그머니 마음을 접곤 한다. 다윗은 말을 조심하는 데 있어 행위를 먼저 경계한다. 차라리 악인 앞에서는 입에 재갈을 물릴 판이다.
그렇듯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2).” 모르는 체 하려니까 그 속이 더 어렵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3-4).” 참 재밌는 표현이다. 대놓고 뭐라 하지 않으려니까 속이 불편할 따름인데 이를 묵상하여 주께 아뢰었더니, 어떠하든 사는 날의 한낱 덧없음으로 연약함을 깨닫게 하신다. 즉 누구더러 뭐라 하지 못해 안달이 나는데, 실은 그것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즉 저의 첫 번째 깨달음은 인생이 참 짧고 보잘것없다는 것으로 소망을 둘 게 못 된다는 것이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5).” 그러니까 이래저래 남들 잘 되는 걸 보고 그게 옳지 않는데도 하나님이 때를 정해놓지 않으신 것처럼 저들은 잘만 사니까, 그게 부럽기도 하고 그렇게 사는 게 복인가 싶어서, 속에 담고 어려워했는데, 돌아보면 우리 인생이 없는 것처럼 허사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며 모든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살았다고 해도 고작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10).”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았던 므드셀라의 생애도 단 한 줄로 요약하면 족한 것이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 5:25-27).” 저의 969년의 생애도 서너 줄로 된 한 문장의 인생이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03:15).” 이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세월인가? 인생은 그저 풀과 같을 뿐이다. 곧 우리는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 같다.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78:39).” 그런 것을 아등바등 늙어서도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그에 따른 명예와 부를, 또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뭐라 말해도 들릴 리 없고 들을 리 없다. 저마다 자기 인생관을 가지고 그 고집대로 사는 꼴이었으니!
나는 정치인 누구를 보며 저가 그냥 정세를 떠나 속인으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울 때가 많다. 또 누구는 그 입을 좀 다물고 자기 일에 전념하며 남은 여생을 마무리하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여럿이다. 그게 다 주변에서 부추겨 끌어들여 그의 명성을 등에 업으려는 자들의 얄팍한 술수인데, 본인은 마치 대단한 존중과 과신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니… 성경은 엄연히 말씀하셨다. ‘인생 의지하지 마라! 그저 잠깐일 뿐이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뭘 그리 억척스럽게 박사 학위를 따느라, 또는 이제 곧 나이 오십 줄에 여자를 어찌 얻어 가정을 꾸리려고, 더 늙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러니 그게 다 하나님을 뒷전으로 미뤄두는 일이 되었으니. 부디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 89:47).” 그러므로 오직 나의 소망은 주께 있다는,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39:7).” 우리는 이 땅에서 영생을 얻을 길 없다. 찾을 수 없고 누릴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원함은 있는 것.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오직 주만이 나에게 영생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뭐라 일러 말로다 저를 위로할 수도 붙들어줄 수도 없는 일이어서, 나는 다만 저들로 속상해하다 말씀 앞에 앉는 것이다. 시편 39편에서 다윗은 그 인생의 짧음을 깨우쳐 의지할 게 없음을 알았고 또 하나는 재물에 대해서도 소망을 둘 게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6).” 솔직히 다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돈 때문이다. 고상을 떨고 우아함을 가장하고 뭔가 대단한 명분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국고 5억여 원을 받으려고 위성정당에 현역의원을 꽂아넣는 작태를 보면서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누구를 가르치는 게 꿈이고 대학 강단에 서서 후학을 양성하며 뜻 깊은 노년을 보냈으면 하였으나, 실은 그 대우에 따른 터무니없는 보수와 그에 비해 시간과 일의 정도가 중하여 그만둔 것이다. 사랑의 고귀함과 가정의 고상함으로 낭만적으로 꿈꾸지만 현실적인 돈 문제 앞에서 차라리 그때마다 필요에 따라 여성을 사는 게 더 낫다는 현실적인 생각(?) 앞에서… 아뿔싸, 나는 뭐라 할 말을 잃었다.
신앙이 깊고 믿음이 투철하다 해도 돈 때문에, 헌금 문제는 언제나 걸림돌이 되어 넘어뜨린다. 생각보다 많이 받은 퇴직금으로 주께 감사할 생각보다는 웬 떡인가 싶어 어디에 쓸 궁리는 하면서도 십일조를 가르치고 감사헌금을 논하자 껄끄러운 것이다. 적당히 적은 돈에서 떼는 것은 기꺼운데 그 금액이 커지니까 망설여져 꼭 그렇게 해야 해? 하고 되묻는 것이다. 풋, 나는 웃으며 고작 그 정도인 것의 척도가 재물이다. 물론 사는 데 따른 돈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돈은 모든 것의 약점이 된다. 더 준다는 회사로 옮기고, 그 일이 또는 그런 회사가 어떤 기치를 내걸고 운영되는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어떠한지 안중에도 없다. 다만 전에 보다 얼마를 더 받을 수 있다는 데서 안도한다. 돈이란 참 희한한 것이다. 안 그런 척 하지만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여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19).” 참 무서운 일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다들 그런 거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결론은 돈 때문이었다. 신기한 건 그 돈이 내 손에 있을 때 그것이 영원할 것 같다. 내게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손에 움켜쥐었던 모래처럼 다 어디로 빠져나갔는지도 모르게 빈손이 되곤 하면서도!
누구는 박사 학위를 따고 그에 걸맞은 일이나 대우가 없어 실의에 빠지고, 누구는 곧 나이 쉰이 다 되는데 결혼도 못하고 있어서 어디 동남아권에서라도 여자를 하나 데려올까 하다 여의치 않아 낙심하고 있었다. 같이 속상하고 답답한데, 성경은 우리에게 강조하신다. 인생 짧고 덧없다. 물질이란 것은 허무할 따름이다. 우리가 소망을 둘 곳은 오직 하나,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누구와 통화를 하면서 이를 알렸고, 오늘 오는 성경공부에서 이를 알려주어야 하겠으나,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3:5).”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할 데가 없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바로 알게 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욥 24:23).” 왜냐하면 인생이란 그저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24).” 그것은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7).” 자 그러니 이제 어쩔 것인가?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9).” 오직 우리는 주를 사모함이라.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나의 신세가 참으로 기구하다 해도,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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