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욥기 26:1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54:4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까. 오늘 우리에게 있어,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그것으로 전부를 말할 수 없고,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마치 내가 잘 안다고 나설 수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하는 욥의 증언 앞에서 고개를 끄덕인다(욥 26:14). 저마다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안타까워하고 또는 무슨 일 때문일까, 하고 눈여겨도 보고 귀 기울여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주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되고 그리하여 나의 생명을 붙드시지 않으면 단 한 시도 사는 날이 의미가 없는 것이어서.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1).” 다윗의 기도에 같이 무릎을 꿇는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2).”
그러니 다들 사는 게 고단할 뿐이어서, 영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할 수 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내 곁에 두시는 또는 나의 여러 일들에 대하여 뭐라 할 말이 없을 때 더더욱 주 앞에 앉는다. 곧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 이 모든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고, 그저 막연한 이 땅에서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어서,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 성령으로가 아니면 알 수가 없다. 나는 성령이 저와 함께 하시길 위해 기도한다.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같이 곁을 함께 하던 사랑하던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 스스로도 한동안 어색하고 불안하고 오히려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온통 뒤죽박죽이 된 것처럼 분열을 일이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바라는 것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 더는 누구의, 무엇의 판단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왜? 무슨 일 때문인데? 하고 우리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예수의 마음으로 성령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일이다. 아이는 무슨 일 때문일까? 누구 때문일까? 하는 식의 이해 접근은 그래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5-17).” 그러니까 종종 누구에게 무슨 일을 의논하듯 나열하는 것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다.
아무리 어떠해도 우리 안의 영은 파괴되지 않는다. 몸과 혼과 영은 함께이다. 몸이 사라지면 혼도 사라지나 영은 남는다. 그러다 주님의 때에 몸의 부활도 이루어진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여 주인으로 삼는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 힘내라, 하는 말은 잘 이겨내라는 뜻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의미다. 의지는 떠넘기고 마는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라, 그리 행하는 결연한 의지다. 의지의 의지가 믿음에서 온다. 아무리 속상하고 마음이 어려워도 그래서 더욱 주를 의지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 의지하는 의지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 주인에게 돌려드리는 일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6).” 먼저는 육으로 알고 다음은 신령한 영으로 안다. 우리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신 말씀의 의미도 그것이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그러니까 우리의 육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우리 영이 아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육이 소중한 까닭은 그 몸에 주의 영을 모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의 속성이 하나님께 순종 되어야 한다. 하지만 죄의 속성상 그것을 거절한다. 성령이 거하시면 한동안 더욱 혼란스러운 까닭은 그 때문이다. 고통 없이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아이는 오지 못해 가까운 교회로 갔고, 아이는 모처럼 늦지 않고 왔으나 죽상을 하고 있었고, 아이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는 내게 더하신 일이라. 무엇을 제일로 붙들 것인가?
안타까움이나 속상함은 나를 붙들어주기는커녕 자꾸 더 흔들어놓는다. 다른 길 없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이에 따른 순종만이 살 길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시는 말씀이 좌표가 된다. 내 고통보다 또는 어떤 급박한 현실보다, 먼저.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 올바른 일의 순서가 필요하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도 이웃 사랑을 우선에 두었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1).” 곧 나의 나 된 것은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고, 그것은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의 이웃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이다. 내가 왜 저 아이 때문에 자꾸 힘들고 지칠까, 속상하고 답답할까 했더니 그것이 우리에게 더하신 사명이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결코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이는 엄연한 약속이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그 모든 것을 주께서 주도하신다(렘 32:38-39).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40-41).” 오늘 나를 여기에 두시는 이유였다. 이와 같은 말씀이 없다면 나는 훌훌 날아서 아주 멀리 도망치고 싶다. 왜 내가 누구 때문에 속상해하고 답답해하고 우울해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라. 이로써 주를 바란다. 주의 도우심만을 구한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 119:36).” 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 것이 아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37).” 아니면 내가 지레 죽을 것 같아서,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38).” 나는 오직 주를 경외할 따름이다. 고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라고 하시는 말씀이 결코 허튼소리가 아닌 것을(렘 32:38).
곧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그러므로 내가 누구를 의지할까?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1).” 곧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2).” 아뢸 곳이 거기밖에 없다. 더는 물러설 곳도 없고 다른 데 의지할 데도 없다.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3).” 세상이 나를 쥐고 흔든다 해도,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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