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욥기 25: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53:2-3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이 맞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4).” 다만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2).” 주의 화평이 아니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 저마다 서로를 부러워하는 법이고 실상은 그 모양이 다를 바 없는 것이어서, 누구의 서러움을 듣다보면 저의 외로움이 모두의 것과 다르지 않고 저의 고충이 다른 이와 다를 게 없는데도 자신만 서럽다. 자신만 억울하고 분하다. 그리 여기고 그리 앙갚음을 하듯 자책하는 데야 뭐라 위로를 한들. 그러할 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주를 기다린다. 나에게만 얼굴을 가리신 것 같아도,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 나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다 저의 말을 들으며 주를 바라였다. 달리 더는 어찌 위로의 말을 구할 수가 없어서 저의 딱한 사정을 들으면서 다만 주의 얼굴을 찾았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42:4).” 다 그래,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라고 해주는 말이 어쩌면 그리도 미안하고 안 됐는지. 하긴 그래도 나는 백 배 더 나은 형편에서 누가 누구더러 다 똑같다고 말할 수 있겠나! 자꾸 극단적인 생각을 해요… 하는 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누가 그랬더라, 바울도 그만 주의 품에 안겨 영생의 나라에 들어갔으면 하고 바라였다. 나는 저의 말에 자꾸 속상하고 답답하였다. 그 외로움이 또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어찌 저의 것이기만 하겠나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가운데 장래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게 얼마나 대행한 일인가? 미래는 알 거 없다. 오늘 하루의 수고로 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그런 이 모든 것이 순리였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다만 기뻐하고 또는 뒤돌아보아 자신을 주께 아뢰면서, 날마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날마다 형통하지만은 않다. 이 둘은 병행하는 것으로 되풀이 될 따름이다. 요즘 부쩍 극단적인 생각을 자주한다는 누구의 말에 그 또한 그럴 때가 있고 보다 나은 날도 있는 것이니, 것 또한 그러려니 하자… 하고 말해주다 나의 슬픔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나는 저의 말에 더는 할 말이 없는데, 누구에게든 묻고 싶다는 것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8:19).” 그래서들 자기 앞날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인내뿐이다. 달리 해줄 말도 없다. 노후 걱정을 해서 ‘곱게 늙는 연습’을 하라고 일렀다. 지금 즐기는 것으로는 늙음을 주체할 길 없다. 마음이 원하는데 몸은 따르질 않으니, 그 무료함을 어찌 견디기만 할 수 있겠나? 나는 저에게 묵상을 권했다. 유치하지만 책 읽기와 글쓰기를 권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만 하니 무료할 수밖에, 그 무료함까지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때 우리의 묵상은 성경을 읽고, 글로 써서 자기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게 복이다. 이를 좀 더 끌어오면 자신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의 이야기가 얼마나 차고 넘치는지… 우리를 오늘 여기에까지 인도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게 그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데서 경이로움이 감사가 되고 경탄이 찬송이 되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 오늘의 너와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사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하시는 말씀이 그 길이다. 우리가 어찌 애굽에서 나왔으며 광야를 지나는 동안 어찌 주께서 낮엔 구름기둥 밤엔 불기둥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더하셨던가!
나는 저의 염려나 오늘의 고통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것이 또한 우리의 숙명인 것을,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인생은 사는 날 동안 그러하다. 오늘 욥의 친구 빌닷의 말이 틀리지 않다.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 25:5-6).” 뭔가 대단한 삶을 산다고 자부할 게 아니다. 우리가 이룬 것은 한 줌도 안 된다. 전날에 누가 박사 학위를 따고 그만한 대우가 없는 세상을 향해 서러워하던데 그건 그러기까지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수고하고 애썼는데, 하는 서러움인 것이다. 곧 자신이 이만큼 이뤘다고 여기는 한 그 무게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인 것이다. 그런저런 것 모두 주께 맡기지 못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고 보면, 이 친구 또한 자신이 여태 보육원에서 나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서러움이 목을 조이는 것이었으니. 안다, 그 서러움과 억울함을 안고 여기까지 견디고 참고 인내한 것에 대하여,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살아온 날을 비틀면 참아낸 세월이 한 줌의 모래처럼 흩어지지 아니하겠나!
나는 요즘 자주 속상하고 자주 마음이 어려워서,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나는 더욱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나는 저에게 두 개의 권면을 하였다. 하나는 아무리 어떠하든 인생은 참 짧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4).” 이는 한낱 이슬의 무게 같고 한 뼘의 길이 같아서,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03:15).” 별 거 없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래서 의지하는 돈이란 게, 것도 참 허망할 따름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39:6).” 아무래도 혼자이다 보니 더더욱 돈에 대한 애착과 악착같은 마음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89:47).”
저에게 위로가 되었을지 아니면 더 곤란한 마음이 들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나로서는 그것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그러나 그리하여서 더욱이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하는 다윗의 고백이 더더욱 우리의 것이 되기를… 그저 남들 사는 것에 부러워하며 저들은 마치 행복하기만 한 것 같은데 자신은 불행하기만 한 것 같고, 애써 수고하여도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 같아서 불쑥, 극단적인 생각이 들곤 한다니까… 나야말로 저를 앞에 두고 턱턱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조건도 처지도 상황도 그저 안 됐고 딱하고 불쌍하기만 한데, 그러니 ‘너만 그런 거 아니야’ 하는 소리는 얼마나 더 잔인하기만 한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38:15).” 나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럼에도 저를 내게 보내시는 이가 또한 저의 마음도 붙드시고 위로하여 주시기를.
다 저녁에 아이는 '아버지 집의 할머니'를 뵙고 왔다며 카톡을 하였고, 혼자 카페에 나가서 책을 읽는다며 전화를 하였다. 다들 그 사는 모양이 안됐고 안타까워서 나는 다만 주를 바랄 뿐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아이는 좀 어떤지, 저의 블러그에 올려진 묵상글을 읽고 내심 나도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40:31).” 사는 날 동안 우리가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더욱 더 주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그러할 때,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51:5).” 하는 주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시 25:5).”
우리의 날들이 모두 주의 것임을. 형통하든 곤고하든 이 모든 날들이 주께서 더하신 것이라면 주께서 함께 하시고 다스리시고 주관하여 주실 것임을.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40:1).” 때론 힘에 겹고 사는 일이 무거워 견딜 수 없는 날들이 많다 하여도,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의 결말을 노래하고 있다. 곧 우리의 날이 오리니,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5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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