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잠언 2:5-6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시편 72:14
어느 날,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여기는 예외가 없다. 그때에 우리가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 9:4).” 어제 말씀을 준비하며 문득 우리의 복됨과 그와 같은 은혜에 감격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집은 우리의 몸이다. 우리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 2:21).” 곧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오늘의 고난은 하나님의 전으로써 연단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게 어떤 형태이든 오히려 우리가 기뻐함은,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나의 몸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즉 이것이 지혜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잠 2:5-6).” 이 땅의 그 무엇이 아무리 나를 괴롭게 한다 해도,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시 72:14).” 하는 말씀 앞에서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는다는 일은 얼마나 고상하고 어려운 은혜인지…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잠 2:2-4).” 그저 나는 수동적으로 끌려가거나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게 아니었다. 며칠째 같은 내용의 설교원고를 다듬다보면 연관 지어 들려주시는 말씀들이 그때마다 새로웠다.
곧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5-6).” 이를 느끼고 깨닫고 삶에 가져오기까지, 결코 우리 자신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주의 성령이 자신의 집을 가꾸시는 일과 같다.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8).” 그리니까 하나님의 집은 내 몸 안에 있다. 이는 어쩌다 우연히 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이와 같은 심판에 대하여도 우리는 두려우나 두려워하지 않고 놀랍지만 놀라지 않는다. 고로 오늘의 고난은 훈련이 되는 것으로 소망을 이루는 연단이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문득 나이가 들면서 누가 꾸짖고 뭐라 나무라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다보면 잘못을 해도 그것이 잘못인지, 또는 그래도 되는 것인지, 만연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때가 있다. 가령 어제는 가족들 카톡방에 우스갯소리를 올렸다가 아버지의 역정을 들었다. 말장난 같은 것을 누가 보냈는데, 아내한테 자꾸 웃기게 적용이 되는 것이다. 코로나로 ‘확진자’가 증가하고 있는 이때에 그래서 집에만 있다 ‘확 찐 자’가 되었다는 말의 유희다. 같이 웃자고 아내 핸드폰으로 그림과 같이 올렸다가 아버지가 지금 이와 같은 시국에 뭐하는 짓인가? 하고 야단을 치신 것이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야말로 늘 말조심을 되새기고 이러할 때 더욱 근신하기를 강조하면서 고작 그런 말장난에 낄낄거린 것이니 혼이 나도 싸다. 얼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전 총리의 아들이 코로나는 ‘코로 난다’고 말장난을 했다가 구설수에 올라 그 아비가 용서를 구하는 기사를 전날에 본 터였다.
우리에게 꾸지람이 있고 어떤 징계나 야단치는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복인가? 성경은 이를 일깨우시는 것이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이것을 받고 느끼고 깨닫는 것이 은혜이고 특권이다. 순간 머쓱하고 무안하였으나 그야말로 웃을 일이 아닌데 이를 희화화하는 것이 오늘 날 문화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그와 같은 세태를 경계하고 근신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섣불리 말하고 대책 없이 낄낄거리며 웃는 것은 참으로 모자란 짓이었다. 곧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우리 안에 고난을 넘치게 함은 또한 우리 안에 위로가 넘치게 하는 일이며, 이는 주의 집을 새롭게 하고 바르고 온전하게 가꾸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 저는 하나님이신데 또한 사람이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그러므로 저는 오늘 나의 고난을 모르실 리 없다. 이 약함과 부족함을 이해 못하실 이가 아니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요즘 가정예배로 함께 읽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진귀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6).” 그래서 우리가 그 죄투성이요, 악하고 추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그럼에도 ‘담대히’ 주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 저녁에 가족들이 있는 가족방에서 벌어졌던 해프닝으로 나는 무안했다가 얼른 잘못을 인정하고, 조카들 보기에 민망했다가 순간 우리가 그처럼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오히려 자신의 존귀함과 감사로 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한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앞서 아이엄마가 통화를 원해 아이 일로 통화를 하였고, 아이의 상태는 하루 이틀 나을 게 아니어서 위로하였다. 이제 곧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고, 있던 곳에서 떠나야 하고, 온 시국이 코로나 전염병으로 두렵고, 가뜩이나 글방 옆 노래방이 철거되면서 소음과 먼지가 며칠째 괴롭히는 이때라… 아이가 병원에서 누구 간호사에게 끝도 없이 말을 이어갔나보았다. 이를 불안히 여겨 아이엄마에게 연락을 해 데려가라 하였고, 그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혹시 평소에 아이는 어떠한가하고 통화를 하였던 것인데…. 어쩔 것인가? 과연 이 길이 맞나? 내가 이처럼 행하고 있는 여기는 어디인가? 종종 나는 그러한 자격이 내게 없음을 주께 아뢰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저 아이가 설마 날 보고 오겠나? 보내시는 이가 없으시면 또한 내가 저 아이를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겠나? 도리어 나의 약함이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지 내가 무엇을 잘하고 남들보다 능력이 있어서 이 일을 내게 두시는 게 아닌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종종 나름 열심히 하고 정성을 다했는데 너무 자주 실패로 돌아오고 하나마나한 일이 되어버릴 때도 또한 다시 묵묵히 감당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었으면 벌써 무슨 수를 써도 썼고 다른 일을 찾아보았어도 백 번은 더 다른 일을 했어야 옳다. 이러고 있으려고 내가 이 일을 했나싶어서라도 스스로 관두고 말았을 일인데, 이 모든 일의 시작도 하나님이셨고 이 일의 진행도 그 결과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나는 그리 믿고, 이제는 엉뚱한 무기가 하나 더 생겼다. 나는 분명히 못한다고 했고,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아뢰었고, 그러니 감히 누구의 영혼을 위하는 일에 쓰임받기에는 턱없이 자질이 안 되는 것을 고백하였다. 이를 알면 알수록 '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이를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이엄마의 구구한 사연에 더는 휘둘리지 않는다. 아이의 딱한 사정이나 그 안타까움으로 끌려가지도 않는다. 그 엄마도 나 또한 연약한 것을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떤 방법을 제시하는 것보다 내가 어찌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하고 사는가를 보여주면 된다. 내가 저 애를 낫게 하고 치유할 거란 맹랑한 소릴 하거나 거짓 확신을 주려는 게 아니라, 외려 하나님이 나를 낫게 하지 않으심을 은혜로 여기는 일에 대하여….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 나는 초라하고 궁벽하나 이 몸에서 하나님이 거하신다. 그러므로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 72:4).” 곧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12-14).” 이와 같이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18-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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