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잠언 6:23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편 76:10
자주 드는 생각이 말씀뿐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사는 동안 여러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으나 앞으로 더할 것은 자연이 그 때를 다하고 사람의 마음이 극에 달한 까닭이겠다. 이 땅의 특징은 본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그 위에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이다. 혼돈이란 황폐하고, 쓸모없고, 무가치한 그 이상의 것인데,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공허라 하면 텅 빈, 아무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 그 이상의 허무인데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사 41:48-49).”
흑암은 어둠으로 아예 빛이 닿지 않는 그 어둠 이상의 어둠으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나 또한 전에는 그러하여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 이제는 그 두려움을 안다. 이와 같은 깊음은 요동하고, 지각이 없고, 멋대로 하는 자기중심으로 무지의 극치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이러한 중에 주의 영이 거하지 않으시면 곧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모든 게 다 허사라.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오늘의 이 어지러운 시국에 말씀을 붙들고 음미하며 다른 데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 복이다. 그리하면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사는 데 따른 노여움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좌절하게 하나 이것으로 주를 찬양하고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신다는 말씀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러니 점점 더 무엇이 중한가?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잠 6:20-21).” 오늘 지혜서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말씀만으로 의지를 삼을 것을 일깨우신다. 곧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그러므로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22-23).” 자, 그러니 우리가 어찌할꼬? 성경은 이와 같은 노여움 앞에 두 길이 놓여 있음을 제한다. 하나는 남은 노여움을 금하고, 즉 회개하고 성령을 받을 것인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7-38).” 아니면 노여움을 그대로 가지고, 마음에 찔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 더욱 노여워할 것인가!
우리의 노여움은 우리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지함을 일깨운다. 그럼에도 누구는 마음에 찔려 더욱 악한 길로 가고, 누구는 회개하고 돌이켜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그런 거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누구는 늘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헐뜯고 허물어뜨려 넘어뜨리는 데 온 생을 다한다. 그러니 저도 스스로를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요즘 어떤 뉴스에 달리는 댓글도 보지 않는다. 스스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계정을 없앴다. 흘러 다니는 가짜가 너무 많다. 진짜 같아서 가짜를 분간하기 어렵다. 교회도, 말씀도, 신앙도, 믿음도 그러한 것 같다. ‘신천지’의 아류인 ‘새천지’가 발각되었는데 저는 목사가 아니라 하고, 교회도 성경공부를 하는 공동체이지 교회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보도를 보며 어떤 노여움이 분노가 마음에 일었으나 오히려 주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었다. 나도 내가 하려고 할 때 뭐라도 저처럼 하지 않았겠나? 두려움이 들었다.
점점 더 어지러운 세대이고, 그 세태를 반영하듯 사람들의 영혼은 갈피를 잡지 못하며, 그리하여 온갖 오락이 그 주제를 망령된 것으로 도배하며 무당을 끌어오고 점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어지러운 때이다. 욥의 친구 소발이 말이 맞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욥 11:7).” 우리는 결코 우리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바울도 말하였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이와 같이 저들은 알 수 없는 지혜를 우리에게 두셨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2:7-8).” 만세 전에 이미 정하신 이 지혜를 안다는 것은 그와 같이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심이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
곧 우리의 앎이 우리는 그저 알게 되니까 아는 것일 뿐인데,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뭐라 한들 저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임이고 그것을 알 수도 없는 것이었다. 고2 아이가 글방에 와도 되는가 하고 물어서 이번 주까지만 좀 더 추이를 지켜보자고 하였다. 하필 아이엄마가 이번 사태 직전에 폐암수술을 하여 더욱 예민하고 조심해야 하는 때이라, 나는 더욱 주의를 당부했다. 그리고 늘 오전에 오는 아이는 새로 들어갈 직장이 코로나로 한 주간 미뤄진 관계로 종일 있다 오후에나 갔다. 그 바람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데, 어쩌겠나? 이것도 저것도 내가 알아서 할 게 아니었다. 곧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지 않았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단순하게 놓고 봐도 내가 이러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이 내 의지나 노력으로 하는 것이겠나? 내 안의 주의 영이 좋아하시는 것으로 나는 저를 의지하며 한 영혼을 마주대하고 곁에 두시는 한 사람을 같이 할 따름이다. 다들 그 죽음 너머는 어찌 될까 하여 두려워하고 있는 이 때에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욥 14:14).”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손위처남이 재차 도와주겠다며 어디 분양하는 아파트에 투자하고 노후를 준비하자는 말에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느라 신경이 쏠리고 마음이 끌려야 하는 것과 그러느라 교회를 옮겨가네 마네 이사가 어떻고 하는 궁리들 가운데서, ‘나의 가는 길을 주가 아시나니!’ 더는 나의 남은 생이 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은 주님의 교회다. 이를 아내에게 다시 분명히 하였다. 만일 꼭 그래야 한다면 그 또한 하나님이 그리하실 것을.
오늘 지혜서는 상기시킨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에 대하여, “곧 교만한 눈과” 어디에 어찌 투자하고 무엇을 중히 여기며 사는 게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 여기는 것과 그러느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곧 많은 말을 보태야 하는 일과 그러느라 요령껏 눈치껏 나의 처지와 상황을 이용하는 일은,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다를 게 없고, 그러다 보면 온통 마음은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같아서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다를 게 없다. 이익을 내가 도모하면 할수록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가 된다(잠 6:16-19). 그게 세상 논리다. 내가 옳다고 하자니 남이 틀리다고 말해야 한다. 진영논리가 갖는 한계다. 정치인들이 보이는 가장 추한 말품이다. 동지도 없고 적도 없다. 쓸려 다니는 안개다. 그러니 오늘의 길은 하나뿐이다. “아비의 명령” 곧 말씀을 지키며, “어미의 법” 곧 성경의 이치를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6:20-21).” 지혜자의 교훈은 단호한 것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23).”
오늘 이 땅에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시 76:6).” 이와 같은 경고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7).” 그러므로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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