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전봉석 2020. 3. 8. 07:07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편 74:16-17

 

 

마음이 어지러운 때이다. 다들 죽어라죽어라 한다. 이런저런 궁리로 마음만 복잡하다. 그러할 때 오늘 말씀은 일침을 가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3).”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다. 형통함과 곤고함이 병행하는 인생이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74:16-17).” 하는 마음의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되겠다. 누가 있었다. 저는 세 아이의 엄마고 목사인 남편의 아내였다. 네 살 된 작은 아이가 병을 앓다 죽고, 열다섯 열일곱 두 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남편인 목사는 서른셋의 나이에 암으로 죽었다. 혼자 된 그이는 묵묵히 주를 바라며 헌신하며 살았는데 쉰다섯 살에 어두운 길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그때마다 저이는 더더욱 하나님밖에 의지할 수 없어 주를 바라였다.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기구함 앞에서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4:24).” 오늘 말씀은 그 의미를 더한다. 인생의 우여곡절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만 이 또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에야 주어진다. 그럴 때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진술은 환난 때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때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저들은 고백하였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35:3).” 나의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은 모든 성도의 공통된 은혜이다. 저는 그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다. 형 에서에게 쫓겨 도망갈 때에도,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5).” 처가살이에서 마음 고생을 할 때도,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31:3).”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갈 때에 천사와 씨름하다 불구자가 됐을 때에도,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32:28).” 세겜의 아들에게 딸이 성추행을 당했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35:11).”

 

한 생을 돌아볼 때 어찌 그 찬란했던 시절만 있을까. 저마다 고생스럽고 서러웠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10:24).” 그러니 오늘 나의 사정은 얼마나 더 나은가. 아무 때나 어디서든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그 말씀을 붙들 수 있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말씀이 내게 거하신다. 누구처럼 구구절절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생은 아니었다 해도, 그 생은 저마다 절대적인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견주어 말할 수 있는 대목은 아니었다. 누구는 다 자란 아들을 아이 대하듯 함께 병원에 데려가고 상담을 하고 약을 더 올려 어떻게든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누구는 소소한 걱정거리로도 벌벌 떨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안에 휩쓸려 있어야 하고. 어떠하든 우리의 위로는 말씀뿐이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

 

그칠 줄 모르는 생의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 주를 바란다. 이를 외면하고 부인하는 이에 대하여는 뭐라 할 말이 없고,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이런저런 모양에서 스스로 진단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무능과 부족과 역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여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는 특권이 분명 우리의 은혜다. 이와 같은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4:6).” 이를 알고 있는 게 복이다. 주의 이름을 아는 자가 복이다. 고로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7).” 사는 날 동안 돈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하고 가족도 필요하나 이 모두는 영구적인 게 아니다. 우리는 다만,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8).” 주를 바라며 주만 의지하고 나아가는 자이다. 특히 목회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주께만 맡기고 나아가는 길이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내 앞에 아내만 있다 해도, 저 한 영혼을 두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누구와 통화하다 그런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자꾸 우리는 낭만적인 생각을 한다. 꿈을 꾼다. 내가 원하는 목회를 바란다. 내가 바라는 자리를 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어떠하든 나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러한 용기와 능력도 주신다. 내 의지로 하는 게 아니었다. 이를 어찌 말해주고 싶었다. 실제 나는 나 같은 자를 어디에 쓰시려나, 쓸모가 없음을 날마다 고백하게 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0:15).” 그래서 나는 어떠하든 교회를 지키고 그 자리에 있다. 누가 오든 안 오든, 있든 없든 내게 두신 일이라. 누가 보면 왜 저는 이런 날(?)에도 나오는가 하고, 종일 혼자서 뭐하는가 하고, 어쩌면 나를 딱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하는 일도 없이 하는 일이 사역이다.

 

사역자의 길은 좀 다른 것 같다.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도 주가 하신다. 나는 누구에게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물론 두 아이의 아빠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가장으로 사는 일도 있겠으나 그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그 자리이다. 거기 있으면서 여전히 그 자리가 맞나? 하고 드는 뭉그적거림이 스스로를 괴롭힐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이를 내가 이해하는 대로 다시 읽으면 나의 약하고 무능력한 것이 주의 능력이 되어 비록 약하나 약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할 것이다. 때론 기계적으로 또는 수동적으로 이 시간에 일어나고 늘 같은 시간에 그 자리에 있고, 하는 일도 없이 하는 일이라는 게 참 무책임한 것 같아 이처럼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지만.

 

나야말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91:1-3).” 그는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자라. 실은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다. 내가 목사가 안 됐더라면목회를 한다고 이러고 있지 않았더라면누구 말에 휘둘려 어디에 뭘 투자하고, 어떻게든 좀 더 먹고 사는 문제로 골머리가 썩으면서아뿔싸, 생각만 해도 끔찍할 따름이다. 그러니 주의 은밀한 곳에 사는 나 자신이야 말로 주의 긍휼하심을 받은 자로다! 긍휼이란 어원이 여호와의 자궁이란 뜻을 갖는다는데, 내가 마치 자궁 속 어머니의 배속에 있는 것처럼 평온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토요일 오후,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누워 책을 보다 문득 일어나 앉아 십자가를 보며 안도하였다. 여기가 내가 있는 자리여서 다행이었다.

 

때론 주께서 권하시는 일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누가 오는 것, 어떤 이의 어려움을 듣는 일, 또는 그와 함께 그 일에 몰두하는 일, 해 봐야 돌아오는 것도 없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다시 읽으면 나는 내 안의 두려움, 주를 경외할 줄 아는 마음이 소중하다. 예전에 겁 없이 살던 시절을 돌아보면 아찔하다. 이를 사람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 일이 귀하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과 같이 내 곁에 두시는, 같이 말을 하고 그 마음을 나누어야 하는 이에게도 그 마음의 일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곧 그 일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 그러므로 좀 부담스럽고 걱정이 먼저 앞서지만,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저를 위하여서뿐 아니라 나를 위하여도 멈출 수 없는 길이다.

 

곧 오늘 잠언은 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4:9).” 오늘 내게 두시는 이 생을 다하는 일이 그것이라. 그러므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23).” 이 얼마나 간곡한 말씀인가. 부디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24).” 그리하면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된다.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74: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