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전도서 10:2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시편 111:4
이 길은 분명하여서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하는 말씀처럼 엄연하다(전 10:2). 가령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어제는 종일 이 말씀 한 구절로 풍성하였다. 즉 나는 어느 쪽인지 선택해야 하고, 의지를 동원하여 자유를 구사해야 하는 주체적인 삶이 아니다. 다시 읽으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아직 인지능력도 없고 판단기준도 모를 때에 하나님은 ‘내 편’으로 자기 것을 삼으셨다. 복중에서 싸우던 에서와 야곱의 경우처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이미 끝난 이야기다. 나는 이제 안도한다.
이와 같은 말씀을 접할 때면 예전에는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왠지 억울한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인데, 이제는 ‘~전에’ 있는 ‘사실’로 안도한다. 이를 묵상하며 주어지는 삶에 감사하며 살 것인지, 거슬러서 자기 나름의 길로 갈 것인지… 인생의 양 갈래 길은 엄연한 것이다. 이 지혜의 깊이와 너비를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그리 여겨지는, 그래서 안도하고 감사하고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는,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시 111:4).”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그 기억’은 은혜였다. 곧 우리 안에 어떤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가령 나뭇가지에 몸을 구겨 밀착하고 몇 시간이고 기다리다 날아와 앉는 새를 낚아채 집어삼키는 살모사의 영상을 보면서, 그렇게 삼킨 것을 여러 날 동안 저장하고, 서너 마리를 한꺼번에 삼킬 수 있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경이로웠다.
또는 어른 제비가 계속 어린것들에게 먹이를 쪼아다 입에 넣어주다, 나란히 가지에 앉은 것들을 끝으로 밀어내며 하나씩 땅으로 밀어버릴 때…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다 이내 밀려서 떨어지던 아기 새는 본능적으로 날갯짓을 하며 무사히 안착하였다. 두 다리로 설 수 있고 걸을 수도 있으며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앉았을 수도 있지만 날갯짓을 하며 이내 하늘을 날 수 있었다는… 미처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때는 그리 안주하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즉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의 최상의 삶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고안하고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특히 저 한 구절에 매료되어 종일 음미할 수 있었던 것,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생기기도 전에,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성별하여 즉 ‘거룩한 의도’를 가지고 계셨던 그 하나님의 무궁하심 앞에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를 성도라 부른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아셨다. 내가 삶을 분간하기 전에 하나님은 나의 삶을 주도하셨다. 그런 거 보면 내가 형성하고 갖추어 형질이 모양이 생겨난 게 아니다. 그냥 주어진 것이다! 곧 오늘 나의 이야기는 그저 내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라 숱한 사람과 사람, 역사와 사회 등이 모여진 것이다. 일련의 오늘은 무수한 이야기들이 한데 이어져 형성되고 구성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누구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나는 그래서 함부로 누구의 이야기에 접속(?)해서는 안 된다. 인위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심리적으로 의존하고 풀이하는 방식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사람은 서로에게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선하지도 못하다. 언제 어떤 사람일지 자신도 알 수 없다. 이를 천주교에서 하는 고해성사보다 못하게 서로들 둘러앉아 또는 마주앉아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또는 회개를 나눈다? 의도는 좋으나 자칫 싸구려 심리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정도로 그치거나 공연히 자기 말에 눌려 상대를 공격할 수도 있다!
사람으로 사람을 대하는 일이란 좋을 때나 좋은 것이지, 사람 관계 그리 일관되지 못하고 그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란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이름값도 못하고 사는지! 요시야는 하나님이 치료하신다는 뜻이고, 여호야김은 여호와께서 일으키신다는 뜻이다. 시드기야는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는 뜻이고, 예레미야는 여호와가 높이신다는 뜻이다. 여호야김과 시드기야는 그 이름값을 못했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의 삶에는 하나님의 간섭과 관여가 있다. 싫든 좋든 그러하고, 그러해서 누구는 순응하고 누구는 거역한다. 성경은 우리를 주체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주도적인 삶이란 엉터리다. 우리는 다만 예수로 산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그 삶의 특징은 뚜렷하였다. 첫째, 구원을 이루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이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에 수긍함이다.
둘째, 이는 곧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셋째, 그래서 우리는 깨어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넷째,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며 산다. 그렇지 않으면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3-4).” 저들의 주장과 조롱이 오늘과 같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5).” 선거판을 보면 사람의 사람됨이 보인다. 편을 가르고 너는 어느 쪽이냐고 할 때 이쪽이든 저쪽이든 자기논리에 젖어 날갯짓을 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6-7).” 이를 오래 되새겨 묵상하면 오늘이 선명해진다.
오늘 말씀은 이를 언급한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전 10:2).” 그 길은 명백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12-13).”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소리를 하고 살까? 또한 저를 지지하며 외려 후원금이 꽉 찼다고도 하니, 뭐라 할 말이 없다! 어쩔까?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1).” 행여 이를 서로가 함부로 나누고 발설하여 저의 회개를 독려하고 같이 회개하는, 심리학적인 안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 사람의 본질이라. 성경은 말한다. 다섯째, 어리석음을 멈추라.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여섯째, 그러기 위해서도 영적인 양식을 먹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2).” 안 그러면 저 죽은 파리로 인해 지혜와 존귀가 난처하다.
부디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전 10:14).” 그리하여 오직 주만 바라며,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시 111:2).” 살모사의 오랜 기다림과 그의 결국을 보며, 또는 제비들이 가진 저 자신들도 알지 못했던 무궁한 가능성과 무한한 섭리를 떠올리며, 오늘 시인의 고백을 듣는다.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3).” 이를 오늘 우리에게 기억하게 하시니,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4).” 고로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5).” 말씀 앞에 아멘이다.
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6-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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