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전봉석 2020. 4. 18. 07:1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 2:10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편 115:11

 

 

늘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내 안의 나이다. 그것을 무어라 정의해도 무방하다. 열등감이든, 자격자심이든, 낮은 자존감이든여하튼 나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하게 만든다. 전에 어느 교회에서의 일이다. 목사님이 몇 주째 설교 때마다 우는 것이다. 그의 눈물은 맥락이 없었고, 그때마다 성도들은 머쓱해하였다. 그러다 얼추 한 달이 좀 되었을까? 그는 설교에 앞서 그동안 말 못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실은 인근 동네의 오토바이 사장이 술에 취해 교회로 찾아왔다. 저는 종종 술에 취하면 주정을 하듯 찾아와 횡설수설 시비를 걸다 돌아가곤 하여, 그날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고 술 깬 후에 오라며 문전박대를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에 저는 자살을 한 것이다. 그 말을 하고 목사님은 다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도 회개하였다. 그때 나는 나이롱이라 울컥, 하고 말았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오늘 나의 현상이 되었다. 누가 나 때문에 잘못될까봐, 미연에 겁을 먹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며칠째 전화를 할까 말까, 어찌 지내는지 마음이 쓰이던 누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로나 때문에 어찌 혼자 잘 지내는가? 물었더니 이번 주간부터 취업이 되어서 정식으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하긴 그의 성격이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전에처럼 편하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나는 그를 호되게 야단을 쳤고, 아무리 편한 사이라 해도 어엿이 마흔다섯 나이가 있는데, 내가 좀 지나치긴 했다. 그런데 주일 날 아침, 말줄임표(……)를 남기고는 더 이상 연락을 받지 않는 것이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 겁먹었다! 몇 번 연락을 하다 주일을 넘기고,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연거푸 전화를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없는데 전화를 받지 않고 저녁 늦게라도 확인을 했을 텐데 답이 없었다. 나는 누구를 통해 수소문을 해야 하나별의 별 생각을 다하다 불안은 가중되고, 안정제를 늘리면서 혹시, 설마, 에이하면서도 엉뚱한 생각에 시달리고 있을 때 전화가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누구는 그래서 병적이라 하고, 실제 내가 아는 의사 형님도 성향이 자신도 그렇다는 소릴 여러 번 들었는데, 저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그래서 술을 마신다. 나는 목사가 되고 늘 태연한 척 굴지만 이와 같은 불안이 강박처럼 따라다닌다. 나 때문에 누가, 무슨 일이 어찌 될까봐. 그것으로 교회가 욕을 먹고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실까봐. 이는 심리 분석적으로 치면 아주 더 오래 전부터 고착되고 방어지제로 내 안을 지배하는 문제이다. 이론적으로는 안다. 머리로는 그럴 거 없다는 것도 안다. 오히려 교만의 뿌리이고, 마치 내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처럼 구는 내 안의 우상이란 것도 안다. 잘 아는데, 그래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아야지 하는데도……. 어제는 문득 누구와 통화하고, 특히 우리 아이, 공황이 온 아이와 통화하다 마침 그 아이가 전공하고 있는 것이 심리학이라 나의 이런 사실을 고백하였다. ‘나 때문에 네가 전염이 된 것 같아!’ 하고 농담처럼 한 소리지만 내내 마음을 울리며 나의 영혼을 짓눌렀다. 그것으로 주춤거리고, 뭉그적대며, 갖은 핑계를 대는 나의 방어기제였다.

 

시의 적절하게 하나님은 이 아침 말씀하신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2:16).” 그러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10).” 우리 영혼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12).” 내 안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그러한 나의 약점을 가지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나 같은 약점을 안고 살아가는 한 영혼으로 씨름한다. 교회를 늘리고 사람을 모으고 어디 보다 나은 쪽으로의 부흥을 꾀하지 않는다. 두신 데서 있는 대로 행할 따름인 것은 나의 소극적이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사역이 되었다. 어떤 목회자가 될 것인가? 하고 목사고시에서 면접 때 들은 물음을 나는 떠듬거리며 그것도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던 것을 또렷이 기억한다. 주께서 보내시는 곁의 한 영혼을 위해 하겠습니다! 그때는 그게 어떤 소원인지 알지도 못하고 답하였다.

 

누가 알겠나만 조현증이 있는 아이는 대화의 맥이 없다. 나름은 할 말이 있어서 하는 소린데, 저의 언어는 미지의 세계 같다. 그럴 때면 둘 중의 하나다. 그러려니 하고 말거나 그와 같은 세계를 상상하는 일이다. 나는 가급적이면 후자를 택한다. 간신히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세계인데 같이 경탄하고, 같이 환호할 수는 있다. 하루에 몇 번이고 전화를 하고 카톡을 한다. 일일이 응대할 수는 없다. 그런 내게 이 말씀은 또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10:10).” 말씀을 읽는다, 묵상한다 하는 소리는 먹어버리는일이다. 아이의 말처럼 그냥 그러려니 하던가, 아니면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 세계를 같이 상상하고 환호하는 일이다. 말씀도 그렇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거나 듣고 말면 거기까지다. 기껏해야 좋은 소리정도나 될까? 하지만 이를 먹어버린다는 일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누가 나 때문에 무슨 일이 날까봐, 그때마다 겁먹기 일쑤인 내가 실은 너무 감정이입을 하여 그렇다는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그러니 안 그러려고 해야 한다는 소린데그게 아무래도, 목회란 게 어디 또 그런가?

 

성경은 주저하는 내게 한 술 더 떠서, 예수를 먹어버리라고 한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6:48-50).”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 도대체 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언가? 요한은 저를 말씀이라 정의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저가 말로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우리 속에 사는 일이다. 곧 저를 먹고 마신다는 일은 그저 막연하게 그러려니 하고 거리를 두고 사는 일이 결코 아니다. 정신과 의사 선생은 그리 조언하고 가깝다는 친구도 나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자주 그런 소리를 한다. 너무 감정이입을 하지 마! 그냥 편하게 생각해! 이를 성경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표면적으로는 내 일 아닌 것처럼 맡긴다는 소리 같지만, 다시 요한의 증언으로 가져오면 그 주께서 내 안에 말씀으로 계신다. 그러므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6:55).” 이는 결코 동떨어진 소리가 아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56-57).” 내가 누구 때문에 또는 어떤 일로 신경쇠약이 가중되어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하는 처지이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58).” 나는 이 말씀의 의미를, ‘갖다가 먹어버리라하는 말씀을 온 몸으로 겪는 것 같다. 누구에게도 솔직히 고백하였다. 나는 너 때문에 겁먹었다! 그러게, 참으로 험난한 길이다. 점심 때 뜬금없이 전화를 한 친구에게는 이런 소리를 백날 설명해봐야 뭔 소린지, 그저 나를 병적으로 치부하며 마음이 여려서로 분류하고 마는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러한 마음을 두신 이가 하나님이시라. 저 아이 또는 누구를 곁에 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고작 나 같은 것에게 이처럼 두시는 일이라면, 그래서 오늘 말씀으로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2:10).” 하시는 것이면, 그래 맞다. 어쩔 것인가? 그 주님을 의지하는 수밖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15:11).”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깃발을 흔들 것인가? , 말씀을 먹어버린다는 것은 그것으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하루를 사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몸을 이루듯 마음도 정신도 이루며, 이를 먹고 싸고 소화시키고 그러므로 성장하는 일이다. 고로 나는 말씀이다. 말씀에 속하였고 말씀이 곧 내 안의 '나'다. 나를 주관하시게 해야 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2:16-17).” 하시는 주님을 먹어버리는 일이다. <그러므로>에서 <그리히지 아니하실지라도>에로,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115: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