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아가서 3:6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편 116:1-2
기도는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 하게 하셔야 할 수 있다. 함께 하신다. 그러기까지 내 안에 시달리는 여러 근심이 있으니, 근심과 기도의 관계는 친밀하다. 그저 막연한 간청은 영혼을 적시지 못한다. 오늘의 한 구절 말씀이 기도의 향기를 물씬 풍긴다.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아 3:6).” 기도는 마치 거대한 행렬 같다. 거기에는 왕의 행렬을 능가할 게 없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시 45:8).” 기도란 만유의 주, 나의 왕 나의 구주 앞에 엎드리는 일이다. 오늘 시편을 다시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 그 기도란 일방적인 아룀이 아니고, 구푸려 옴짝달싹 못하는 의미가 아니다.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나의 사랑’의 간절한 기다림의 공간, 몸짓, 시간이다.
오늘 아가서의 첫 구절은 먼저 나를 찾는 주님을 연상하게 한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1).” 시간은 밤이다. 공간은 잠에 젖었을 침상에서다. 곧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 5:2).” 이를 알 때에야 기도가 나온다. 함께 따르는 것이 몸짓이다.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2).” 역설적으로도 나를 찾으시는 주님의 분주함이 나의 기도에서 발견된다. 그러니까 기도하기 전까지는 그러한 주님을 알지 못했다. 마음은 늘 저 혼자 어려워서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어려워 주를 바란다. 잃어버린 자를 찾고자 하고, 찾은 자를 다시는 잃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부주의하다 어디서 잃은 것인지, 처음 사랑을 잃었다. 성령이 일곱 교회에 편지하실 때 가장 처음 교회였던 에베소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그동안 잘 참고 잘 견딘 것을 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7).” 한 마디로 그 사랑은 기도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되었을 때 비로소 들린다. 내가 왜 어린아이와 같이 무모할 정도로 믿고 따르고 의뢰해야 하는지,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그리 말씀하시는 예수님도 어린아이로 오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뭘 안다고… 하는 심정으로, 나 같은 게 하는 것도 없이… 하는 마음으로 송구해할 때,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 그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의뢰다. 기도다. 주를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서 드러내는 일이다.
나는 특히 하루 중에 아침을 사랑하고, 그것도 공휴일이나 주말의 오전을 즐거워한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마치 숨겨놓은 뼈다귀를 은밀하게 뜯고 있는 사자처럼 즐거워하며 그르렁거린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내 안의 떠듦이 요란하다. 아들 문제로 마음이 쓰여 생각이 미치면 염려부터 앞선다. 누구 생각에 안달부터 나고, 여러 일로 근심이 재촉한다. 그런들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먹이를 움키고 놓지 않는 사자 같다. 이는 또한 하나님이 나에게 오셔서 나를 위해 싸우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염려는 여전하다. 돌아앉아 약병을 든다. 어쩔 수 없이 눈물도 핑, 하고 돈다. 염려는 한 시도 떠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시간이 아침의 바로 이 묵상의 시간이다. 이를 쓰고 쓴 것을 오전에 펼쳐 다시 읽으며 음미하는 장소이다. 그러는 동안에 어떤 것으로부터도 훼방 받고 싶지 않은데, 이른 시각에 특히 아무도 출근하지 않는 오전의 주말의 고요한 아침의 몸짓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몸살이 나고 엄살을 부리던 것을 주님이 그때마다 맛보아 알게 하시는 것 첫 번째가 실감나는 말씀의 공간이다. 좋아서 밑줄을 긋고 옮겨 적고 여러 번 되뇐다. 연관 지어 살필 수 있는 성경을 찾아나서는 일은 즐겁다. 좋아하는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모든 독서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목적에 따른 이해와 근거와 응원의 독서다. 다른 하나는 저자의 목적에 따른 이해와 그 근거가 되는 말씀의 현장과 참여의 읽기, 곧 먹기다. 전자는 정보를 가지고 자신의 이해와 만족을 위하는 독서다. 후자는 저자, 하나님과의 인격성이 내 안을 휘젓고 관여하고 스미는 독서다. 이를 운운할 때 아가서보다 은밀하고 직접적인 책도 없다. 연인의 모든 것은 연인 아닌 이의 눈에는 전부다 이상할 따름이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고, 같이 있으면서 같이 있고 싶고, 다 알면서 더 알고 싶고, 말했으면서도 또 말하고 싶고, 곁에 있는데도 자꾸 돌아보는… 마치 마법과 같은 연인의 마음이 그때마다 실현되는 것이 기도다. 가령 셋째 주일이라 부모님이 오셨다. 같이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서로 뭘 더 챙겨주지 못해 안달이다. 약 기운에도 그렇고, 일찍 자려고 누웠는데 아들에게서 두 개의 소식이 들어왔다. 하나는 은근히 속 끓이던 차가 팔렸다는 소식이다. 필리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졸지에 애물단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대사관에 같이 근무하던 누가 뜬금없이 우리 교회에 헌금을 하고 싶다며 교회 계좌를 물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목사의 아들로 자랐다며…. 일련의 상황을 돌아보면서, 내가 그처럼 안달을 부리던 것을 하나님은 보란 듯이 해결하고 계셨다!
기도도 독서다. 읽어야 한다. 성경의 명령처럼 먹어야 한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9-10).” 억지로라도 씹어 삼켜야 한다.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 기도는 종종 갖다 먹어버리는 행위다. 주님, 하고 아뢰는 일은 말씀을 먹는 일과 같다. 요한도 그러했지만 예레미야도 그랬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렘 15:16-17).” 우리 안의 간절함은 도리어 주의 뜻보다 앞서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먹어버려야 알 수 있다. 에스겔도 같았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 2:8, 3:3).”
이처럼 먹는다는 행위는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내 안에서 그것이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자체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 사는 일이고 살아지는 일이다. 싫든 좋든…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는 내게 주님이 되신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시인의 고백이 내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시 116:1).” 그러할 때,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2).” 그가 내게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을 내가 어찌 알까? 먹어버린 말씀은 내 안에서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안다는 정도도 아니다. 콩나물의 효능과 시금치의 영양소를 아주 잘 안다고 해서 그게 내 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성경은 절대 설명서가 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해설서도 아니다. 주님의 살과 피다. 내가 먹고 마셔야 하는 먹잇감이다. 나는 요즘 이런 묵상에 사로잡혀 있다. 누가 뭐라든지 세상이 어떻든지, 나는 누구에게 종종 늙는 연습을 강조할 때면 반드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할 때 혼자 있는 시간을 대비하고 더는 내 마음 같지 않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해야 한다. 곧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어쩔 것인가?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3-4).”
그러할 때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5).” 이를 음미하고 즐기고 맛보아 알 수 있는 것이 복이다.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6).” 그러니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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