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아가서 1:8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 114:7-8
갈 길을 알 수 없을 때,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한 발짝 앞서 걷는 이의 발자취는 귀하다. 저만치 목자가 보이지 않을 때,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하시는 오늘 말씀의 의미를 되뇐다(아 1:8). 그리하여 힘써 하나님을 알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그리할 수 있도록 오늘의 일상에 두시는 것임을… 여느 때보다 진정이 안 되고 마음이 어려운 하루였다. 일일이 그 이유를 밝혀 원인을 분석한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는다. 다른 날보다 안정제를 더 먹었는데도 어려워서 병원에 전화를 했다. 담당의사는 약을 더 먹고 그래도 계속 힘들면 오라고 했다. 늘 보면 하나마나한 처방인 듯하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게 주를 바라는 것일 뿐. 때론 서성거리고 때론 가만히 앉아 주님, 하고 부르면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고였다.
신경과민이고 신경쇠약이라는데, 그러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 내 의지대로 되나. 나는 상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성경을 마주한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그러한데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송구하였다. 주를 바라는 데 있어 나의 이 어려움이 없었다면 이토록 내가 간절할 수 있었을까? 누구는 말하길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고, 누구는 또 자기 욕심 때문이라고도 하였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오히려 이러는 게 다 목적이 있어서인데,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으려는 심리라고 했다.
어떠하든 “인자야 내가 애굽의 바로 왕의 팔을 꺾었더니 칼을 잡을 힘이 있도록 그것을 아주 싸매지도 못하였고 약을 붙여 싸매지도 못하였느니라(겔 30:21).”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주를 바랐다. 누가 이 마음을 알까. 주께서 나를 인도하시기를. 나를 빚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삼으시려는 것일 텐데,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내가 주의 손 안에 있다는 말씀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그저 한 덩이 진흙에 불과한 나를 필요한 것으로 빚어 그것에 맞게 쓰시기까지, 그러니 나의 마음을 돌이켜 주만 바라게 하심이었다.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8).” 이내 싫다고 하면 그 뜻을 돌이키신다는 것인데,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10).” 어떤 날은 이렇고 어떤 날은 저렇고, 나의 하루하루가 주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주께서 나를 쓰신다. 죽지 않고 살아서 살아 있는 동안에 주의 일에 합당하도록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 이 땅에 쓸모없이 태어난 존재는 없다. 그냥 왔다 그냥 가는 인생은 없다. 그리 여기는 데서 불순종이 켜켜이 싸여지는 것이다. 문득 지난날을 떠올리다, 또는 여전히 거기에 있는 친구를 생각하다, 내 곁에 두시는 가족과 아이와 일상에서, 그러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나는 주를 사랑할 따름이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10:12-13).” 이와 같은 말씀으로 나의 날을 돌아보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30:2-4).”
나는 내가 죽겠어서 주를 바란다. 그럴 수 있는 이 날의 어려움이 헛되지 않다. 그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6).” 이울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10).” 주를 바라는 것뿐이다. 다 아는 마음의 일인데도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딱히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인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곧 나의 예민함과 신경쇠약이 윌리엄 쿠퍼와 같이 남은 생을 쥐고 흔든다 해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10).”
저의 새 생명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그렇게 예수의 방식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그렇게 나를 짓이기고 으깨어서 빚으시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삼으시는 것이 토기장이 되신 주의 손길이시다. 그러할 때 또한 참을 수 있는 인애도 주실 것이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 6:4).” 그렇게 나는 또 정하신 날에 정해진 시간을 따라 묵묵히 그저 무던하게 그 자리에 놓으신 바를 다할 뿐이다. 저녁이 되어 가정예배를 마치기 무섭게 약에 취해서인지 나는 일찍 잠이 들었다. 누구도 마음이 쓰이고, 아이 때문에도 양심에 찔리는데, 어제는 전화를 두 번이나 거절하였다. 뭐라 상대할 기력이 없었다.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다만 주의 긍휼하심을 덮고 잠에 빠졌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10:12).”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주어진 현장에 나가는 꼴이다.
하는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도 주가 두시는 자리를 지킬 따름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릇을 장식장에 모아두시려고 빚으시지 않는다. 용도에 맞게 쓰시는 일은 주의 일이라. 나는 다시 아침에 일어나 주 앞에 앉는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12:6).”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사는가? 선거가 끝나고 한쪽은 웃고 한쪽은 운다. 누구는 자책하고 누구는 자축한다. 그러는 세상에서 나는 어느 쪽이 아니다. 다만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오후께 아버지와 통화를 하다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나는 눈물의 출처를 모른다. 왜 자꾸 감정이 앞서는지 알 길이 없다. 두려움인지 염려인지 괜한 조바심인지, 더는 묻지 않는다. 그게 무엇이든지,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렘 2:2).” 내게 두신 날을 담을 뿐이다.
용기의 용도나 쓰임에 따른 크기에 대해서는 토기장이의 손길이다. 그렇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나는 주의 것이라. 그러므로 주가 이루실 것이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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