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아가서 5:6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8:28-29
낫지 않는 상처도 있다. 돌아앉으면 괜찮다가도 돌아앉으면 성난다. ‘어찌하여 이 상처는 나을 가망이 없어 보입니까? 이 떠나지 않는 고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하는 예레미야의 서러운 마음을 읽으며 알 수 없는 공감을 얻었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렘 15:15).” 나를 박해하는 것들, 누구에게 말하기도 어려운 상처를 안고 씨름하는 것은 분명 고달프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대화하기보다 하나님에 대해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데 하나님에게 말하기는 어렵다. 돌아오는 게 없는 것 같고 나 혼자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을 때도 든다.
오늘 아가서를 보다 그런 암담한 밤거리를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그 밤에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아 5:7).” 그러니 누구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를 있어보이게 한다. 우쭐하여 내가 좀 인정받는, 남다른 사람처럼 여겨지게 한다. 그런데 아,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6).”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종교적인 이야기는 어느새 언쟁이 되고 또는 자기자랑처럼 각별한 체험에 도취하게 되어, 정작 문을 열었다고 생각하였는데 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를 보란 듯이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논쟁한다.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렘 15:17-18).” 내가 하나님 편에 섰다고 여겼는데 어째서 나의 이 고통은 계속됩니까? 왜 더 중하고 나아지지 않는 것입니까? 그저 신기루처럼 다 거짓말이십니까? 속이는 샘물이십니까?
더러 성경을 보면 어찌 감히 하나님께 그렇게까지 함부로(?) 말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과한 표현들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또 역으로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시니까 가능하다. 남이면 어찌 그러겠나? 그렇듯 대들다가도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31-32).”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이 된다. 오늘 고백도 그러하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18:28-29).” 종종 보면 혼자 있을 때 내가 드러난다. 주목 받는 자리에서야 누군들 목사답지 않겠으며,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 않겠나? 부쩍 요즘 들어 자주 씨름하고 생각하고 되뇌는 일이 혼자 있을 때의 나다. 그 자신의 모습이 인격의 현주소다. 공적인 외투를 벗고 집에 있을 때, 또는 가족들도 없이 혼자 있는 시간에서야 자신의 본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과연 그런가?
예레미야의 독특한 독백, 즉 혼자 있을 때의 저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더 있을까 모르겠으나 여덟 번의 저의 모습을 메모하였다. 그 본문을 일일이 옮겨 놓을 수 없다(8: 18-9:3, 11:18-23, 12:1-6, 15:10-12, 15-21, 17:14-18, 18:18-23, 20:7-18). 이는 모두 1인칭으로 독백의 장면인데 하나같이 기도였다! 그 내면이 드러날 때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 저의 특징은 같은 사역자들이나 친구들 또는 교회의 누구와 떠벌이듯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는 대단히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지도 않고,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역사적인 배경을 비추어 사람들의 믿음을 분석하지도 않는다. 타종교를 운운하거나 더 분별하려 하지도 않는다.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님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진리란 연구로 얻는 게 아니다. 거저가 아니면 값을 주고 얻을 수가 없다. 저의 독백은 다만 공통적으로 하나님께 나간다.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 대든다. 할 말 다 한다. 살아 있는 인격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대화의 소재로써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 대상이 된다. 나에게 관심 있는 이시니 나를 숨기지 않는다. 마치 의사 앞에서 내 상태를 다 내보이는 것 같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게 전부다. 하나님과 마주할 때 우리의 언어는 수준이 올라간다.
가령 누구와 만나 친밀하게 대화하는 자리에 식사를 하든, 티타임을 갖든 그와 나누는 그에게만 집중한다. 친절한 종업원이나 잘 꾸며진 실내 인테리어나 시설의 편의성에 대해서도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거기에 함께 있는 그 대상이 전부다. 같이 거리를 걷고, 어디를 가고 할 때도 온전히 그와 나의 세계다. 뜬금없이 주변의 것에 이끌려서 그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일은 당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한 날이 그렇듯, 어떠하든, 혼자 있을 때가 좋은 것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무슨, 누구를 생각하는 일 따위의 것이 모두 소품일 뿐이다. 글을 써도 그에 대한 것이다. 책을 읽어도,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저를 말 하지 못해 안달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그러다 또 문득, 기도란 그리 경건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근심과 걱정을 토로한다. 할 말 못할 말 가릴 게 없다. 투덜거리기도 하고 누구에 대해 실컷 뒷담을 까기도 한다. 전에는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사람들을 만나면 씹어대고 즐기던 남의 말이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26:22).” 그것이 우리들 뱃속에 쌓이거나 하나님 앞에 풀어내어지거나 둘 중 하나다. 때론 온당하지 못하고 순전히 나의 이기적인, 나에 대한 소원만 징징거리듯 아뢴다. 그러던 것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나온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아뢴다는 행위가 기도다. 그러다 보면 이상하게도 삶의 모든 순선순위가 정돈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렘 15:19).” 주께 기도하는 것이 그저 일방적인 독백이 아니다. 그러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그저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무료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상하게 바쁘다. 즐거운 분주함이다. 밑줄도 그어야 하고 메모도 해야 한다. 메모한 것을 이처럼 묵상 때 글로 옮겨 정리도 해야 하고, ‘나중에 설교할 때 꼭 전해야지.’ 하고 별표를 해두기도 한다. 기도는 경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만 실컷 토해내고 떠들어대는 것 같았는데 그 하나님은 어느새 정돈을 하여 버릴 마음은 버리게 하시고, 따로 모아 두어야 할 마음과 일과 여러 여건은 정리하신다. 그러면서 듣는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20-21).” 하나님의 약속이 굳건하게 나를 붙드신다.
오늘 시편의 말씀도 그러하여서 감사가 이를 알게 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8:1).” 결국 이 모든 것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6).” 자신만만해지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7).” 아무리 어쩌니 해도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8-9).” 나는 더 이상 이를 잃고 싶지 않다. 시선을 다른 데 놓치고 싶지 않다. 혼자 있는 시간이 참 좋은 것은 가만히 그냥 가만히 그의 앞에 있어도 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14).” 마치 엄마 아빠가 오셨을 때, 아내는 분주하고 딸애도 할 게 많은데 나만 편히 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다. 다음 날 아내는 불쑥 ‘얄미워!’ 하고는 쳇, 하였다. 그러다 말고 매일 아침 친정엄마를 보러 가는 게 그것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17).” 이 하나님의 편하고 좋고 행복한 사실에 대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26).” 얼마든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28).”
그러므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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