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전봉석 2020. 4. 22. 07:0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아가서 6:3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119:49-50

 

 

1980년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조지 루이츠는 1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하지만 곧 논란이 되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출발선에서 시작한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저는 42.195 킬로미터 마라톤에서 1.6 킬로미터를 남겨두고 뛰어들어 결승점을 1등으로 통과한 것이다. 환호하던 사람들이 그녀를 힐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다른 마라톤에서 실력을 증명하겠다고 우겼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대회에도 출전하지 않았다. 의학계에서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반사회적 이상성격자라고 하였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와 같은 기사를 인용하여 반종교적 이상성격자에 대해 설명하였다. 일주일 동안 제대로 달려가지 않은 사람들이 일요일에만 교회에 나가고, 한 시간 남짓 예배와 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을 가지고 마치 자신은 42.195 킬로미터를 1.6 킬로미터만 뛰고 결승점을 통과했다고 자부하는 조지 루이츠 여성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듯 우리의 신앙생활도 경주에 비유한다면 그럴 것 같다. 이에 바울 사도의 표현에서도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저마다 어디서 어떤 과정에서 출발하게 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이미 출발선에 섰던 것이다. 이를 깨닫기까지 그래서 남은 길을 전력질주하기까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15:19).” 곧 오늘의 말씀으로 우리를 세우셨고, 오늘을 지나 꾸준하게 달려가게 하셨다. 그 길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19).” 말씀만 붙들고 가는 것이다. 그 길이 즐거운 까닭은,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6:3).” 회복된 관계에서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이 크게 들린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119:49-50).”

 

성경은 우리에게 돌아설 것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25:5).” 단지 그릇된 행실에서 뿐 아니라 그들과 같이 하던 길에서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그러할 때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119:47-48).” 하는 것이 내 것이 될 것이다. ‘노련한 등산가는 보폭을 유지하고 일정하게 숨을 고른다. 조용하고 규칙적이며 짧은 보폭을 지닌다. 안개가 끼면 당황하지 않고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다가 가던 걸음을 지속한다.’ 우리의 인생이란 쉼 없이 하루하루가 오고 계절이 오고 나이가 든다. 우리의 걸음은 그와 같이 보폭을 유지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이 말씀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다. 내가 지혜로운 길을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길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고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4:11-12).”

 

하루 하다 말 게 아니다. 결승점을 앞두고 냉큼 들어섰다고 해서 완주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꾸준하게 그러면서도 일정하게, 예레미야는 23년의 목회를 한결같이 달려갔다. ‘쉼 없이’, ‘무던하게의 히브리어 단어는 하쉬캠이다. 같은 언어로 쓰인 부분이 여럿 있었다. 내가 거듭거듭(7:13), 나는 쉬지 않고(25-26), 한 시도 멈추지 않고(11:7-8),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25:3), 쉼 없이(26:4, 19), 끊임없이(5), 그렇게 애썼건만(32:33), 그토록 수고하였어도(35:14),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15, 44:4) 어쩌면 오늘 나에게도 이와 같은 마음의 결의와 실행의 무모함이 따라야 한다. 한 명이 오든 한 명도 안 오든, 누가 어쩌든, 내 사정이 어쩌든지묵묵할 수 있는 길은 말씀을 의뢰하는 길밖에 없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108:1-2).” 그런데 누구는 하루만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한다. 그 이상이 걸리면 흥미를 잃는다. 한두 번 써보고 안 되면 마는, 나는 고2 아이의 글을 보면 늘 안타깝다.

 

이랬다저랬다, 갈팡질팡, 가만히 돌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그 걸음이 참으로 그러하였다.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2:23-24).” 저녁에 글방을 나서다가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층 교회 목사를 만났다. 같은 층을 내놓고 7층 어디로, 누구와 같이 하게 됐다고 짧게 근황을 말했다. 누가 있어 나는 더 묻지 않았다. , 하는 나의 짧은 이해는 탄성과도 같았다. 조만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꾸 여러 길을 도모하였다. 지역사회를 위해 누구와 연합을 하네, 어디 교인과 같이 뭘 하네, 누가 어떠네, 하며 저의 근황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무던함이 없이 이 길이 용납하겠나? 우리가 길을 못 뛰는 게 아니라 길이 우리를 받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괜히 서운하고 안타까웠다. ! 하는 나의 탄식은 할 말이 많은 외마디였다. 궁금했으나 나설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움직여도 아무 데도 도달하지 못한다.’ 목사의 숙명인 것 같다. 감히 내가 목사를 운운하고 목회에 대해 의견을 말할 위인이 못 되지만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내가 또 안 한다고 해서 안할 수 있는 길도 아니다. 오후께 막내와 통화하며 그런 생각을 하였다. 부교역자로 있는 교회의 이런저런 사정과 담임목사의 성향에 대해 전해 들으며, 어쩔 것인가! 다들 저마다의 길을 가는 것 같으나 그 길은 주 위에 놓여 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가늠하게 한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7).” 우리의 배움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를 독려하고 동행하는 것이 말씀이다. 그러니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9).” 나의 바람은 오직 하나.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10).”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코로나19 여파로 교회가 어렵다는 말이나 성도가 있고 없고 교회가 그 사명을 다 하는 데 있어,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32).” 내가 뛰는 게 아니다.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도 아니다.

 

속된 말로 안 되면 마는 건데, 처음부터 나는 내가 한다고 한 적 없다. 억지로 끌어다 놓으신 자리다. 다만 이 아침마다의 말씀으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3:22-23).” 그저 오늘 하루다. 날마다 하루뿐이다. 이에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119:33).” 그리하시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34).” 가만히 말씀을 입에 머금고 음미한다. 부디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37).” 또한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41).” 그렇게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지함이니이다(42).”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43).” 고로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5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