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전봉석 2020. 4. 24. 06:55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아가서 8:14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편 119:147-148

 

 

때론, 그냥 먹어야 한다. 어떤 이유나 나름의 대단한 수고에 따른 보람이나 결과가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주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때론, 그냥 무모할 정도로 달려갈 뿐이다. 가정예배로 같이 계시록을 읽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10:9-10).” 이를 입으로 읊조리며 마음에 와 닿는 느낌으로는 좋은데 이를 살아가는, 달려가는 데는 내 배에서 쓰게 되더라.’ 참 많이 싫증나는 일이다.

 

아이가 다 늦게 카톡을 했다. 결국 한 달 남짓 다니던 직장에서 또 그만두게 되는 모양이다. 자신이 부족해서 그만두기로 했다는데, 말이 그런 것이고. 뭐라 위로를 해야 하겠는데, 할 말도 없고 속상하기만하고 솔직히 싫증도 나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내용을 읽고 덮었다. 아침 일찍 누구는 전화를 한다. 아니 아무 때나 하필 꼭 뭘 하고 있을 때면 그런다. 통화 거절을 누르고 나면 내내 마음이 또 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삼킨 것을 도로 뱉을 수도 없고, 어쨌든 속에서 그것이 내장을 돌고 짓이겨져 녹아지고 근육이 되거나 뼈가 되거나 악성염증이 되거나 만성염증이 되거나. 어쩔 것인가?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2:8-9).”

 

주가 물으신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21:15).” 그러니 어쩐다? 그냥 주를 사랑하는 것으로, 주의 사랑을 받기만 할 수는 없을까?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16).” 말씀이 때론 우리를 궁지로 몰아가신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17).”

 

감사하게도 항공권이 나와 돌아오는 28일 밤 비행기로 아들이 귀국하기로 되었다. 현지 인터넷망 여건으로 발권이 안 돼 서너 차례 실패를 하다, 내가 결국 저들과 통화하고 대신 결제까지 완료를 하는 와중에 아이의 전화가 들어오고 이를 거절하고, 좌우지간 일처리가 잘 돼, 52일 영세해외항공사의 여건이 오락가락하던 것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렇듯 잘 마무리 되자마자 아이가 난데없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니! 영락없이 그럼 또 매일 글방으로 와야 한다는 소린데. 그래서 한동안 여섯 일곱 번을 먹던 안정제가 진정이 좀 되면서 네 번 세 번으로 줄었다 싶었더니만, 어쩜 이렇듯 아귀가 딱 맞나 싶을 정도다. “내 양을 먹이라.” 주가 더하시는 일이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15:16-17).” 말씀을 의뢰하며 나아가는 수밖에. 내가 누구의 보모가 되어줄 수는 없으나 저에게 말씀을 들려주고 살펴 이를 먹이는 일이야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8:14).” 오늘 아침 말씀은 알 수 없는 부담감으로 마음이 불편한 내게 격려의 음성이다.

 

그리하여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119:147-148).” 이처럼 말씀 앞에 앉게 하시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31:4).”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일이고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이 곧 뜯어서 먹고 삼키는 일이다. 이에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38:14).”

 

때론 눈물이 되고 가슴이 저려, 왜 내가 저 아이 때문에누구 때문에괜히 이처럼 불편한 마음을 자처해야 하는가했더니, 그게 나에게 맡기시는 주의 사랑이시라. 입에 쓴데 속이 달면 좋으련만 입에 단데 속이 쓰니 환장할 노릇이다. 가정예배 후에 아내는 나의 시무룩한 모습이 우스웠든지 자꾸 히죽거리며 다녔다. 5월에는 딸도 쉬고 아들도 이제 들어오니, 이런 궁리 저런 궁리하면서 놀 생각이었는데.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34:8).” 이는 싫고 좋고의 일이 아니다. 잘하고 못하고도 없다. 그냥, 달려가야 하는 일이다. 내친 걸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19:103).” 나는 이 맛을 음미하며 혼자 있고 싶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황홀경에 젖어 그곳에 초막 셋을 짓자고 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이해한다. 입 안 가득 그냥 가만히 머금고만 있고 싶다. 삼키고 싶지 않다. 애가 또 오고, 누가 또 같은 소릴 해대며 늘 그 타령의 일로 성가시게 하고, 그러나 내 안에 어떤 책임감을 불러일으켜 이를 외면할 때면 불편함으로 시달리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러니 어쩐다? “갖다 먹어버리라하는 말씀이 어떤 뉘앙스였는지 알겠다(10:9). 억지로라도 삼켜야 한다.

 

읽기와 쓰기는 같이 가는 한 몸이다. 읽기만 하는 독서는 없다. 성경의 영적인 독서는 더더욱 인격적이고 계시적인 관계의 언어다. 자꾸 나를 이끈다. 내 몸 안에서 생성되는 전혀 새로운 삶이다. 단순하게 여기 이처럼 글을 쓰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씨름하고 부대끼고 또 마주하고 다투고 견주면서그럴 수 있도록 하나님은 또한 그때마다 앞뒤가 맞게 배열하신다. 일의 순서가 전혀 내가 예상했던 게 아니다. 혼자 속 끓이던 것들이 머쓱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이는 싫든 좋든 삶이다. 삶은 그 안에 담을 그릇이 있고, 그 형식이 나로 하여금 바깥으로 튕겨나가지 않게 한다. 내 삶의 울타리로 아이도 있고, 누구도 있다. 나의 불안증도 있고 누구의 이런저런 사정도 있다. 그러니 그 어미의 심정은 오죽하겠나? 그저 남 이야기 같지 않다.

 

그런 것이다. 왜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셨을까? 창조도 이 땅에 오시는 일도, 있으라 하시는 말이었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주의 인도하심이란, 나로 그 이야기 안에 들어오게 하신다. 하나님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어느덧 내 이야기를 더하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로 섞으셨다. 나의 하루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괜한 고백이 아니었다. 예수 밖의 이야기로 있던 사울이 예수 안에서 예수님의 이야기, 바울이 되었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8:13-14).” 주가 이루시는 사랑이라. 그러므로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119:101-102).”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1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