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이사야 2:5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121:4
우리는 영적인 야곱의 족속이다. 구별된 이스라엘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우리를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그리하여 나로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3).” 이와 같은 말씀을 여러 번 되뇌어 묵상함으로 힘을 얻는다. 그저 동감하는 정도가 아니라 삶으로의 반영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그러니 온전하기란 말에 있지 않고 삶에 있다. 지긋지긋한 일상의 일이다. 느낌도 개념도 막연한 의지도 아닌 실제이다.
먼저는 소유를 버리라는 것, 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는 심각한 오해에 빠지게 되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경우처럼 말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4-25).” 그의 오해는 무지에서 비롯되었고, 편견은 도리를 벗어났으며, 해야 할 일은 땅에 묻어두고 미루었다. ‘두려워하여’ 그랬다는 말에 내 안의 변명과 어떤 자책이 나를 찌른다. 아이나 누구를 대하는 데 있어 나는 저가 어떻게 될까봐, 하는 두려움으로 짐짓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그렇게 미뤄보려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는 내가 내 것인 줄 알기 때문이다. 나를 내 소유로 아는 까닭이다.
똑같이 한 므나를 받았던 사람 중에도 그러했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눅 19:21).” 이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소유권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일이다. 내 몸으로, 내 가족이고, 내 돈으로, 내 시간을… 하는 식으로 내 것에 대한 소유욕구가 온전히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게 한다. 그러니 이는 그동안 나눌 수 없던 것에 대해 기꺼이 나누는 데서 시작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8-9).”
그리고 성경은 일러 일어나라! 함께 가자! 하고 일깨우신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 그럴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있는 우리 영혼을 일으키시기 위해서도 문제를 조성하신다. 일이 생긴다. 말씀으로는 귀 담아 듣질 않기 때문이다. 주님이 부르신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막 2:14).” 신기한 건 그럴 자는 그러고 그러지 않을 자는 이내 그러지 못한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그러니 소유가 많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막중한 일인가? 좋다고 마냥 끌려 다닐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발길이 뒤 따르는 자의 이정표가 된다. 귀신들렸던 자가 자신도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였을 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막 5:19).”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 구분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를 차별로 받거나 누구만큼 갖지 못하는 열등의식으로 생각한다면 주인의 뜻을 오해하게 된다. 오해는 편견이 되고 편견은 자신의 완고한 외길을 낸다. 그 길을 가족이 따르고 곁의 사람이 동행한다. 혼자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늘 질서 있게, 균형 있게 하라고 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 속성이란 게,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 14:28-30).” 무엇보다 자신이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채찍이 필요한지 당근이 필요한지 분별해야 한다. 가령 우리는 딸애도 아내도 토요일이면 늘어지게 잔다. 대부분 하루 종일 나가지도 않고 뭉갠다. 아무래도 5월 휴직을 하면 자신은 그처럼 게으를 것 같다면서 딸애가 염려하였다. 염려하면서도 우리는 다시 또 뭉갠다. 늘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종종 아내는 나더러 참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그건 꼭 그래서가 아니다. 아니면 늘어지고 게으름은 금세 곰팡이처럼 번지고 누룩처럼 부풀린다. 내가 주께 돌아서면서 희한하게 나를 잡아 이끄셨던 강권하심이 몇 가지 있다. 가장 선명한 것은 30여년 이상 습관적으로 태워오던 담배를 끊은 것이다. 습관은 한 번 몸에 배면 자기 의지로 빼내기가 쉽지 않다. 앞서도 몇 번 금연을 시도하고 별의 별 방도를 찾았으나 번번이 실패했던 것을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딱, 끊어지게 하신 것이다. 또 하나는 가정예배다. 신대원을 결심하고 몇 개월 준비하면 어지간하면 붙을 줄 알았는데 떨어졌다. 역시 내 갈 길이 아닌가, 하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그 전부터 매일 저녁 가족들이 다 모이는 시간에 맞춰 가정예배를 드리게 하시는 일은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내가 신기하다고 하는 것은 그때 큰애가 고2, 작은애가 중2였으니 학원 끝나고 어쩌고 하고 돌아오면 12시가 다 되거나 훌쩍 넘길 때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질서 있게? 규칙적인 시간으로 들어간 것이다. 매일 아침 묵상을 하고 묵상 글을 쓰면서부터, 식사 시간, 집을 나서는 시간, 오전 시간, 오후 시간… 딱히 꼭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누가 지키거나 같이 하는 일도 아닌데, 이제는 그리 정해진 시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편하고 유익하다. 항상 혼자 있는 축이라 ‘오늘은 뭘 하지?’ 하는 따위의 고민도 있을 법한데 그럴 필요가 없다. 규모 있게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가장 우선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식습관은 물론 우선순위나 정해진 것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가장 유용한 게 되었다. 나는 이를 따로 구분하여 자주 누구에게도 권한다. 우린 언제고 혼자다. 사실 보면 언제나 혼자다. 혼자 있는 시간을 혼자 유익하게 보내려면 규칙적인 자세가 그 일상을 담아낸다.
사실은 이 모든 게 주가 하신 일이라. 나는 내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기 싫을 때도 있다. 웃기는 건 지금도 가끔씩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이란 참…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그럼에도 한사코 내 것에 대한 나의 주장은 나의 영혼을 망가뜨린다. 내 자식인데, 그 온전하지 못한 것을 두고 혹시나 자신이 죽으면 어쩌나 하면서 아이엄마는 울먹였다. 그 얘기 끝에 나는 또 겁먹었다. 혹시나 몹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은 현상이 겹겹이 닥쳐오니까. 나는 저에게 그것까지도 자신이 짊어질 것이 아니라고 일렀다. 말이 그렇지 나 또한 그런 처지이면 그렇지 않겠나? 큰애에게 짐이 될까봐 아이엄마는 작은애를 떠안고 큰애를 밀어내고 있었다. 서로가 지치는 인생이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 121:5-6).” 오늘 말씀은 눈물겹다. 의지하고 붙들려 새 힘을 얻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앞서 누구에 대해 열거하다, 또는 아이에 대해 글로 쓰려다 그만두었다. 같은 말뿐이다. 답이 없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누구를, 아이를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묵직하게 답답하면서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내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그 자체가 얼마나 교만한 마음인가 알겠다. 아,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비장한 포고는 요지부동이다.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시는 오늘 말씀을 다시금 되뇐다(시 121:1-2).
그러할 때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래, 다른 길 없다. 답이 없다. 대책이 안 선다. 끝이 없다. 이어지는 좌절 가운데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 121:3).” 오늘 시편은 다짐시킨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4).” 그러므로,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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