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전봉석 2020. 4. 28. 06:34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이사야 4:2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1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성경은 이끄신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감사로 사는 존재다. 감사를 잃고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게 향하신 계획이다. 감사하는 일은 그만큼씩 거룩해지는 일이다. 이를 알 때 두려워진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6:5).” 내 입에 감사보다 원망이 가득하다. 염려와 근심으로 메마른다. 이 시대의 양상을 따른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 돈을 사랑하고 돈을 자랑한다. 돈으로 교만하여진다. 돈을 따라 서로를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한다. 그러는 중에 감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거룩하지 않다. 무정하다.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 그 안에 늘 억울함이 있어 분풀이로 누구를 모함한다. 절제하지 못한다. 예전에는 가성비(가격에 비해 성능이 좋은 것)를 따져 물건을 고르던 것이 이제는 가심비(가격과 상관없이 마음에 좋은 것)를 추구한다. 그러한 것을 억제하려 하면 사나워진다.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든 더 나은 쪽으로 배신한다. 조급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신뢰하고 자만한다. 나아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 그리하여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갈한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명하신다(딤후 3:1-5).

 

이러한 때에도 우리가 주께 감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구원의 기쁨으로 사는 일이다. 거룩을 사모함이다.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간다 해도 우리가 거룩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워할 줄 아는 자세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12:29).” 우리가 계획하고 꿈꾸는 미래는 얼마나 허망한가. 죄를 자각해야 한다. 내 입이 부정한 것을,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6:5).” 그래야 자비와 용서를 구한다.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7).” 그것,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6).” 말씀이 나를 치리하시는 길뿐이다.

 

그리하여 소명을 마주하는 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8).” 그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 감사다. 자기 충족을 포기하고, 자비와 용서를 경험하고, 섬김의 일로 주의 이끄심을 따르고,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일이 감사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감사는 단지 고맙다고 느끼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116:12-14).” 이 은혜를 알면 알수록 나는 어찌 갚을까, 하는 마음이 하루의 삶에 담기게 된다. 그 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내 마음에 두시는 서원을 갚아가는 삶이다.

 

어떤 날은 심하게 출렁거리고 어떤 날은 평온하였다. 어제는 어땠고 그 전날에는 어땠다. 그때마다 일희일비해서는 감당이 안 되는 마음이라, 이런 날은 이런가보다 하고 저런 날은 저런가보다 해야 한다. 일일이 끌려 다닐 수가 없다. 어제는 진정이 안 됐다. 친정 갔다 오는 아내와 점심을 먹으려고 하다 김밥 한두 점을 먹고 얼른 도망치듯 교회로 올라왔다. 연거푸 안정제를 먹고도 서성거리며 진정할 수 없는 마음을 달랬다. 그럴 때의 말씀이라니!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 범사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그 이상의 고통이 중첩되는 가운데서도 감사하라는 소린데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 3:4).” 일차적으로는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교회를 일컫는 말씀이고 나아가 오늘 나의 처지와 상황에서의 이야기이다.

 

어거스틴의 표현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괜한 공염불 같은 소리는 아닐까? 감사란 게 좋을 때, 누구 덕을 볼 때, 희소식 앞에서 터져나오는 것인데진정이 되지 않아 마음을 추스를 수 없을 때, 불안이 엄습하여 목을 조르는 것 같을 때, ‘왜 그러지?’ 하는 생각이 오히려 더 나를 옥죄어 들 때, 어찌 감사가 터져 나올 수 있을까?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이를 내 이야기로 다시 읽었다.

 

내가 어떻게 붙들렸던 세상에서 구원을 얻어 돌아설 수 있었는지, 그처럼 죽어라 하고 따르던 나의 사랑하는 우상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며, 장래의 노여움에서 건지실 예수를 바라는지, 곧 오늘 이처럼 주를 바라며 주만 의지하며 살 수 있게 하셨는지이를 돌아보며 묵상하는 일에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뿐만 아니라 장차 나의 남은 날들이 어떠할 것이라 해도 오직 주만을 바라며 의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예수님 때문에 살아났고,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고, 예수님 때문에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 거룩이었다.

 

이에 상응하는 것이 더는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 일이다. 게으름이란 죄의 바닥과 같아서 오죽하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6:6).”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만도 못한 존재로 규정하고 계시는 것이다. 게으르다는 것은 그 영혼이 두려울 게 없는 꼴이다. 그러니 준비할 줄 모른다. 하다못해 개미도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8).” 장차 우리가 들어갈 죽음 너머의 영생에 대해 묵상하는 일이란, 결코 게으를 겨를이 없게 한다. 그러다 언제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11).” 그러지 않게 하시려고, 오늘 하나님은 내게 나로 살게 하셨다!

 

종종 나는 나로 사는 일이 너무 힘들다. 이 몸을 이끌고 살아가는 일에서는 물론 이유도 알 수 없는(알아봐야 소용없는) 두려움에 휘말려 쩔쩔매는 꼴하고는! 지쳐 쓰러지듯 잠깐 소파에 누워 등을 지지다 곤히 잠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잠깐의 상쾌함이 주어졌다. 그때의 말씀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은 앞뒤로 엄호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가능한 전진이었다. 먼저는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어떻게 이런 판국에 기뻐하란 소린가? 얼마나 대단한 영성의 소유자로 살아야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능가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없다. 다만 그 밑천은 기도였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걸을 때도 앉을 때도 누워서도 누구와 어떤 일로 어디에 있을 때도, ‘쉬지 말고그리할 때에 비로소 감사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 이를 위해 주가 오셨다. 나를 구원하셨다. 나와 함께 하신다. 나로 당신의 이야기의 한 부분을 채우게 하셨다. 그러려면 어찌 해야 할까?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19).”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라. 주를 바라는 데 있어 누구를 생각하게 하시고, 할 수 있거든 돌보고 섬김으로 이를 받게 하심으로,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2)” 이는 곧 말씀으로 그 기준을 삼는 일이다. 아무리 허황되고 이해가 안 되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으나, 하찮은 말씀은 없다. 이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21-22).” 여기에서도 범사에라는 표현이 언급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떠하든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나는 안도하였다. 어떠하든지 바로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4:2).”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신다. 그럴 때 나의 입에서는 단 하나의 고백과 기도가 드려질 수 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2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