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9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편 130:4-5
퍽, 하고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이… 아이가 갑자기 울었다. 나는 순간 불안인지 미안함인지 안타까움인지, 정체불명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아이 앞에서 안정제를 서둘러 삼켰다. 어쩌면 우리는 에덴을 쫓겨나고부터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사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자책하고, 엄마 아빠의 이혼과 오늘의 자기 장애를 모두 자신의 잘못으로 짊어지고 사는 것이다. 울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나는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라 다음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의 지난했던 세월동안 숱하게 겪은 감정이라 어쩌면 그래서 더 안쓰러우면서 화가 났다. 늘 나는 누구의 놀림이 되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았으며, 그러한 괴롭힘에 익숙하였다.
어느 요리사의 약혼녀 누구 피디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보도를 읽으며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 저이는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여러 피해자들의 지탄과 함께 뭇 사람들의 공분을 견디지 못하고 그렇듯 선택을 한 것이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고 의식불명인 상태인 보도에도 사람들의 댓글은 잔인할 따름이었다. 나는 오히려 저이를 응원하고 잘 견뎌내 주길 바랐다. 학창시절 그야말로 정글 같은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기를 쓰고 버텨야 했다. 자의든 타의든 나는 항상 놀림의 대상이었고 누군가의 먹잇감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가해자였던 누구 피디에 대한 공분을 나는 안쓰러워하고 있던 것이다. 당해봐서 알지만 가해자들도 실은 아픈 것이라… 저도 자기 자신을 어찌할 수 없어 그처럼 못되게 굴었던 것이다. 지어낸 말 같지만 고3 때 같은 반에 전교 짱을 먹던 아이는 어느 사찰의 주지스님의 아들이었다. 위로 여러 명의 배 다른 형님들이 동인천과 부평역 일대를 주름잡는 어깨들이라 아무도 저를 건드리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같은 반이었던 목사 아들 나는 모든 애들의 만만한 놀림감이었는데, 어느 날 그 애가 나서서 더 이상 나를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고 엄포를 놓고 난 뒤로 고3 시절이 무난하였다. 그런데 보면 저 애는 늘 나보다 더 아픈 아이였다!
어제는 갑자기 아이가 울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 말 저 말을 주워 삼키는 스물네 살의 남자아이는 안쓰러움 그 자체여서, 나는 어찌 위로를 해야 할지… 아이의 눈물과 어느 피디의 자살기도와 내 아들아이의 차가운 태도와 나의 엉거주춤함이 한데 뒤섞여 속이 복잡한 하루였다. 그때마침 시의적절하게 말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편지를 읽는 엘리사와 그마랴의 목소리로 말씀하셨다(예레미야 29:4-9). 저들은 지금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살고 있는 중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 처지와 상황을 상상하며 들으면 오늘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언지 선명하여진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즉 그곳에서 비관하고 슬퍼하기만 할 게 아니라, 비록 끌려간 곳이나 그곳을 개간하고 일구어 먹고 살라는 소리다.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그곳에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일상을 살라는 소리다. <줄어들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 의미심장하였다.
그러면서 한 술 더 떠,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적국인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고 그 성읍이 평안해야 그곳에서의 우리 생활도 평안할 것이라는 것인데,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듣고 믿지 말라.” 서로 주장하고 내세워 말하기 좋아하는 목사들의 그럴듯한 설교나 어느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놀아나지 말라는 소리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저들은 그저 저들 주장을 지껄이며 주어진 상황을 더욱 혼탁하게 하는 말쟁이들인 것이다(4-9).
여기까지는 오늘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은가? 포로 된 삶을 살고 있다. 아이는 본인도 주체할 수 없는 장애를 안고, 겪고, 시달리며 살고 있다. 아이엄마는 그런 아이를 떠안고는 힘에 부쳐 시들어간다. 한집에 사는 형도 집을 나간 아빠도, 가족들은 가급적 외면하면서 안타까움을 삼킬 뿐이다. 당사자나 그 주변인들이나 모두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들이다. 이는 저의 이야기로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현실이다. 누구는 박사학위까지 어렵게 따고는 여전히 밥벌이의 전선에서 총알받이로 살고, 누구는 다시 교수 임용에 내야 하는 세례교인 증명서를 구걸하듯 내게 부탁을 하였다. 누구는 일류 대학만 섭렵한 수재이면서 모 벤처기업에서 상머슴처럼 일만한다. 그러면서 술주정뱅이 부친과 병약한 모친을 건사하고, 자신들의 고질적인 목디스크에, 여러 질병에 끌려다니며 크고 작은 어려움에 봉착하여 안간힘을 쓰듯 신앙을 붙든다. 보이는 게 어떠하든 모두는 다 포로 된 자로 살아간다.
그런데 성경은 ‘거기서’ 살라는 것이다. ‘그곳의’ 평안을 빌고 일상을 살라는 것이다. 좀 더 이어서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0).” 70년 시간이면 한평생의 세월일 텐데,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11).” 이 무슨 아리송한 말씀일까?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12-13).” 누가 말하길 ‘재난은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하였다. 그래야 바른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안이하고 게으른 영혼을 일깨우는 것이다. 성경의 분명한 어조는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소리다. 하나님이 조성하셨고 그리 계획하신 일로, 저의는 우리의 그릇됨이다.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우리는 저마다 수치심을 안고 산다. 싫든 좋든 사실이다. 그럼 선택은 두 가지다. 책임을 전가하여 ‘누구 때문이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외면하면서 한사코 현실을 부정하고 살거나 다른 하나는 이를 인정하고, 주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며 온 마음으로 구하고 찾으며, 이와 같은 말씀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주어진 바 오늘의 삶을 충실하게 살던가…! 나는 울고 있는 스물네 살 남자아이 앞에서 주춤거릴 겨를도 없이 안정제를 꺼내어 삼켰다. 저 애의 슬픔이 또는 서러움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가되었고, 나는 나 하나 건사할 능력이 없으면서 저 애를 맡아 이처럼 쩔쩔매는 꼴이었으니… 자, 그러니 어쩔 것인가? 우리에게 늘 선택지는 두 가지가 놓여진다! 부정하고 외면하고 누구 탓을 할 것인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주어진 텃밭을 일구고 씨를 뿌려 열매를 먹으며, 맡기신 생을 다할 것인지…. 스마야는 예레미야의 서신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예루살렘에 남은 스바냐 선지지에게 항의하였다(27-28). 다들 가지가지라. 누군 이러고 누군 저런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니 나는 어쩔 것인가? 아이엄마의 선택을 강요할 수 없다. 심지어 아이의 선택을 강제할 수도 없다. 나는 아이가 돌아가고도 진정이 되지 않는 마음으로 생각이 많아졌으니… 말씀의 의도는 알 수 있었다. <닥치고, 주신 삶에 충실하라.>는 소리다. 나의 빈곤한 이해와 언어는 그리 정리하였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그래서 어쩔 것인가? 부모가 이혼을 했고, 그것이 자기 탓이라. 직장에서 또 짤리고, 그래서 엄마가 실망을 했고 자신은 주눅이 들었으며 그러니 빌빌거리는 것인데, 그래서? 그것이 자기 잘못이라. 어쩔 것인가? 나는 아이의 눈물을 마냥 받아줄 수도 그렇다고 다그쳐 울지도 못하게 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 내 몸이나 마음 하나 변변하게 건사할 수 없어 평소보다 많은 또한 여러 번의 안정제를 삼켜야 했고, 가정예배를 드리고는 밀려든 피로감에 녹초가 되었다가 새벽 일찍 이렇듯 말씀 앞에 다시 앉았다. 어쩌라고? 그러니 살든지, 죽든지. 살아서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허덕이든지 비록 포로 된 지경이나 그곳을 개간하고 일구어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의뢰하며 묵묵히 평안을 빌며 살든지….
오늘 아침, 이사야서의 말씀은 소망을 전한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저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들에게도 70년이 다하면 주께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곧 끝이 있다는 말씀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비록 주어지는 삶은 번번이 녹초가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시 130:4-5).” 이 모든 재난은 우리로 주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내 아들에게 가지고 사는 미안함과 속상함은 나의 포로 됨이다. 내 육신의 장애와 여러 고충도, 심지어 심리적인 유약함으로 누구보다 쩔쩔매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포로 된 삶에서도… 선택지는 두 가지다. 그래서 더욱 주를 의뢰하든지, 내 주관대로 판단하고 나 자신을 의지하든지! 하면, 나는 주를 경외함이라. 오늘도 말씀을 붙든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곧 그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 그로 인한 놀라운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6-8).”
오늘을 평안히 살 것인가, 마지못해 투덜거리며 죽지 못해 살 것인가…. 나는 의식불명인 어느 피디가 깨어나기를 기도한다. 저들 두고 공분이라는 명목으로 무차별 댓글을 다는 이들에게도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모두 모두에게 가해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피해자이다. 그것은 염연히 여기가 본향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에 주어진 곳이라. 나는 이곳에서 본향을 일구듯 주신 이의 뜻을 바라며 평안을 빈다. 그리하여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을 위해서 기도한다. 단지 저들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나의 평안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시 130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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