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편 128:2
이에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5-6).” 이보다 더 복된 삶이 있겠나? 모든 게 주의 은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나의 구주 나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섬김으로,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하는 언약의 말씀을 받는다. 이처럼 말씀 앞에 있으면 평안하다. 얼마나 수시로 불안과 염려가 엄습하는지, 뭔가 안정이 안 된 느낌으로 마음만 자주 어수선하다.
누구로 인해 마음이 쓰이고 그래서 전화를 할까 말까, 좀 어찌 지내는지, 마음은 어떠한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은 저 혼자 들쑤시고 다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사는(?) 소식에 또 공연히 서운하기도 하고 애만 태웠다 싶어서…. 그러는 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나? 어쩌면 이를 ‘사랑의 빚’이라 하는 게 아닐까?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뭔가 갚아야 할 것 같은데 갚을 길 없는 마음은 자꾸 엉뚱한 데서 빈 마음을 보충하려 하는 것이고 보면, 그것으로 저를 위해 마음 쓰고 기도하게 하려 하시는 것이겠거니…. 혼자 그리 마음을 다독이었다.
곧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저 막연한 게 아니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 내가 주의 제자로 산다는 길이었고 그러므로 마다할 수 없는 마음인 것이다. 자꾸 신경 쓰여서 부담스러운데, 부담스러우니까 더욱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계시가 된다. 시시콜콜 이 마음을 다 들추어 설명할 길은 없으나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불편함이 나의 사명을 독려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리하여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 주의 말씀을 삶 가운데서 실천하게 하시려는.
여느 날과 다를 게 없이 교회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같은 층 교회 사모를 만났다. 7층으로 좀 더 넓혀서 몇 교회가 같이 연합으로 교회를 하려는 것인가 보았다. 그렇잖아도 같은 층에 철거가 이루어지고 있어 궁금해 하던 차였다. 다들 암중모색이라. 그저 나는 내 자리를 지킬 따름이다. 그리 당부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란 게 여럿이 모이면 탈이 나게 돼 있는 것이라… 가만히 주신 길 간다는 게 어쩌면 가장 어려운 모색이 아닌가 싶다. ‘이런 시대에’ 가만히 있다는 게 죄 같이 여겨지기는 하겠으나, 목사가 가만히 있는 게 어디 가만히 있는 것이 되겠나? 성경 한 줄이라도 더 보고, 누구 생각이라도 한 번 더 하고, 그러느라 주를 더욱 바라고…. 그러기엔 아직 젊은 나이라 쉽지 않은 일일까? 아니면 뭔가 해야 한다는 수고와 노력이 마음의 증표로 필요한 것일까? 이 또한 공연히 생각이 많았다.
결국은 사랑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주는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4:16).” 서로의 거함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나는 형태는 여럿이기는 하겠다. 나는 마스크 너머 아직 젊은 사모의 피로함을 느꼈다. 정리가 되면 한 번 찾아뵙겠다는 지나가는 인사를 듣고 헤어지며 어떤 마음의 부담을 느꼈다. 너무 많은 일을 벌이는 취향이라, 그 사모의 피곤함이 가실 날이 없겠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은 피로할 따름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나는 곁에서 그렇듯 목사 아버지와 사모 어머니와 그 자녀들 되는 형제들과 같이 살아봤다. ‘넘치는’ 수고는 우상이다. 나의 생각은 늘 그러하였다. 수고와 열심을 다해 주를 바라고 충성된 종으로 사는 길이 목회이겠으나 마땅히 생각할 그 정도이면 족한 것인데, 여럿이 모이면 감투가 쓰이고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은 분주함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교회의 연합이라…. 모르겠다, 나는. 각각의 가정을 세워가는 것으로도 족할 것 같은데 학연지연으로 연결된 목회현장이란 게 좋을 때야 서로가 연합할 수 있겠으나 나는 그렇듯 사람 관계를 긍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둘이 모이면 결이 생기고 셋이 더해지면 출렁거리게 되어 있다. 어릴 적 나의 기억으로도 교회란 늘 분란의 연속이었다. 물고 빨고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던 사이가 얼마쯤 지나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었으니, 이를 일반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원리도 그렇지 않던가? 하나님은 흩으셨다. 바벨의 사람들을 흩으셨고, 초대교회의 끈끈한 밀집형태도 흩으셨다. 낱알을 흩뿌려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성도가 많고, 그래서 사역을 분담하여 감당하느라 하나둘 모인 것이라면 모를까… 하나둘 교회에 사람이 없으니 하나둘 목사들의 가정이 그리 모여 동업처럼 연합교회를 이루는 것인데… 나는 혼자 여러 생각으로 어려웠다. ‘지나친 열심’은 오히려 해롭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그러므로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6-18).” 그 모든 게 주의 선하신 인도하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를. 묵묵히 저들 내외가 말씀으로 기도로 교회를 일궈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 응원하였던 일이라, 그렇듯 나이 많은 여럿이 목회를 한데 섞는다는 것이 나는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나서서 뭐라 할 소리는 아니었다.
늘 보면 내 코가 석 자라.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 같아서 선뜻 나설 수 없는 게 어디 한둘이겠나? 그래서 난 더 혼자 있는 훈련을 한다. 주께서 하시라. 보내시든지 그만 놓아주시든지, 나는 다만 지금 여기 주의 성전을 지킬 따름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지만 청소를 하고 정돈을 하고 혼자 앉아 말씀을 뒤적거리면서… 청중이 비록 아내와 ‘저 아이’ 하나뿐이라 해도! 내가 마주하고 증거하는 대상은 수천수만 수억 명의 대중 못지않다. 빈 허공을 마주하고 말씀을 전하고 설교를 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책을 읽거나 찬양을 듣는 일은 모두 주를 의지함이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물론 내 안에는 싸움이 연속이다. 합리화시켜 자신을 두둔하려는 게 아닌가 하여, 나 역시 뭐라도 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글방으로 다시 교습소 등록을 하고 아이들을 받아야 하나… 어디 다른 교회라도 가야 하나 싶어서…. 그러면서 저들에 대한 마음이 나의 마음을 꾸짖고 다스리게 하는 것 같았다.
됐다, 이게 나에게 두신 자리고 그의 맡기심이다. 그리 여기며 혼자 있는 시간도 귀한 것이라.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종은 주인이 정하신 일에 충성하고, 군인은 명령을 따라 복종하며, 운동선수는 정해진 룰에 맞추어 경주를 하는 것이다. 더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손위처남과 아내가 어디 신도시를 운운하며 이사를 할 수 있겠는지, 그러자면 교회도 가야 할 텐데 괜찮은지… 하는 소릴 물었을 때 나는 분명히 말하였다. 가고 오고, 하고 안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이제는 나의 결정이 아닌 것이다. 주가 이루실 것이다.
곧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5-6).” 이것은 나의 싸움이 아니다. 저는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이시라. 아버지시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7).” 다만 나는 여기 있을 뿐이다. 이처럼 새벽 일찍 눈을 떴을 때도 주께 먼저라. 한 날의 더하심이 주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18-20).”
고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7-8).” 내 능력이 아니라 주가 더하신 선물의 분량대로 맡은 바를 다할 뿐이다. 충성이란 주인의 기쁘심에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만 하루에 한 발씩, 다만 그 한 보폭의 거리만큼 주께 가까이 나아갈 뿐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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