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7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돌이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삶은 위태롭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2).” 저마다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사는 것이겠으나, 우리의 구심점은 말씀의 경고라.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13).” 하는 자의 오만함에 대하여,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14).” 그런 자를 누가 설득하여 되돌릴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 안의 두려움이 복이다. 에녹은 무드셀라를 낳고 주의 심판의 경고에 집중하여 남은 생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5:21-23). 당시 죄악의 참상을 대변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라멕이었다. 저는 죄를 사랑하였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4:23).” 그 결과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24).”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 마음은 오만함과 교만함으로 가득하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이어지는 참상은 가히 두렵기만 하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29-32).” 그러할 때 에녹의 동행은 귀하다. 저의에는 심판의 경고에 귀 기울인 순종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 앞을 떠나가는 가인의 후예들은 이를 알 길이 없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그러할 때 오늘의 말씀은 새로운 소망을 가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주가 다루신다.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를 알 때 우리 믿는 자의 생활은 연합함으로 아름답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말씀을 묵상하며 이를 삶으로 가져와 때론 어그러져도 또는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 같아도 묵묵히 준행하는 삶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곧 이와 같은 믿음이 그 자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잘 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아침마다 나는 아이로 인해 이와 같은 사실에 직면한다. 의사소통이 어렵고 무엇을 전달하는 게 무의미하다. 뒤에 듣던 딸애가 너무 어려워서 그러는 거면 수준을 낮춰서 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게 또 조심스러운 것은 아이가 벌써 스물네 살이다. 싫든 좋든 존중이 필요하고 이를 못 알아듣는다고 해서 어린아이 대하듯 하면 무시당하는 기분이라. 나는 종종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도 한다.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믿음으로다. 주가 보내시고 내게 두시는, 맡기신 바라. 영적인 성장은 이와 같은 믿음에 기초를 둔다. 믿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해가 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우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할 따름이다.
아이가 오기 전에 누구와 통화를 했다. 좀 어떤지, 저의 안부를 묻고 생활을 듣는 일은 불편하다. 안 됐고 답답한 마음만 앞서서 나의 측은지심이 나를 옥죄는 형국이라. 그렇다고 모르는 척 할 수 있나? 전에 같으면 그냥 안 보고 말면 그만일 텐데. 이해가 안 되어도 깊어지는 이해가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종종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당장의 이해를 바라는 마음이다. 왜 이 사람과 이런 시간을, 대화를, 저로 인해 마음을 섞어야 하는지… 자꾸 이런 말하기가 민망하지만, 오전에 하루치 안정제를 다 먹으면서 겪는 일이었으니. 그러면서도 감당하는 것이다. 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나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다들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했다. 에녹의 동행에서부터 바울의 헌신과 다윗의 순종과 아브라함의 믿음은 주어진 그 현실을 딛고 날마다 믿음으로 한 발씩 내딛는 삶이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 5:22).” 저가 은둔하여 홀로 유아독존 독야청청한 것이 아니다. 지긋지긋한 일상과 넌덜머리나는 사람들과 주어지는 한 날에서 주와 동행함이었다. 라멕이 어떠하든, 세상 사람들이 어떠하든 무던하게 주만 바라는 삶이라니! 그리함으로 하나님께 인정 받는 삶,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24).” 이는 ‘믿음으로’에 의한 것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고로 우리 앞에 선택지가 놓였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아이 때문에 힘드니까 다른 것을 모색하겠나? 누구 때문에 외면하는 삶을 살겠나?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이를 받아들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자가 성도다. 우리 믿음의 선도들도 그리 행하였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19-20).” 고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그렇게 오늘 아침 시편의 말씀을 묵상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를 송축하라 (0) | 2020.05.10 |
---|---|
여호와를 송축하라 (0) | 2020.05.09 |
그들을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 (0) | 2020.05.07 |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0) | 2020.05.06 |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0) | 2020.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