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이사야 16:6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시편 135:15
모든 게 가하나, 모든 것에 신중하고 절제하는 삶이 필요한 시절이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 6:12).” 세계 곳곳을 보면 사람의 태생에는 즐기고 싶은 욕망이 가득한 것 같다. 전염병이 창궐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클럽에 가고 해변에 무리지어 모여 설마, 하고 안일하게 군다. 닥쳐봐야 아는 일이지만 닥친 뒤에는 늦었다. 자중하고 자제할 줄 아는 삶이 훈련되어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다. 혼자 있는 일도 연습이 필요하다. 물론 주가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이를 알면 알수록 더더욱 신중하고 덕을 위해 산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23).” 그저 혼자의 삶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4).”
누구는 그와 같은 사명감으로 이 난국을 헤쳐가고 누구는 안이하여 클럽에서 무리지어 한데 어울려 논다. 누구와 통화하다 기어이 좀이 쑤셔서 일을 찾아 나섰다는 말에 그 심정은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반 토막 난 수입에 원망이라니…. 이러면 이래서 저러면 저래서 감사보다는 늘 원망이 앞서는 것이다. 본능이라. 원래 그러는 것이다. 나는 저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권하였었다. 더는 어려울 때가 오나니 그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이라.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러기 싫어 뭐라도 하겠다며 일을 구한 것인데, 그 일이 또 전에처럼 제 가치를 다 받지 못하는 일이어서 투덜거리는 꼴이라. 혼자 있을 때 진정으로 감사의 의미도 되새길 수 있다. 클럽이나 해변에서 미친 듯 즐기고 놀 때는 알 길이 없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에서는 쾌락과 자기만족이 우상이다.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사 16:6).” 백날 경고를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게 다 사람 좋자고 사람을 위해 사람이 만든 것이라.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시 135:15).”
그래놓고는 또한 쩔쩔맨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16-18).”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지 못할 때는 아무리 있고 또 있어도 있는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법이다. 그러니 나의 기도는 단순하였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7:8-9).” 가령 아내는 종종 나를 짐처럼 무거워한다. 돌봐야 하는 부담으로 여겨 힘에 겹다. 그러는 게 고맙다가도 싫다. 이는 내게 아들의 존재도 그렇다. 그러려니 하고 두면 되는데 계속 마음이 쓰이고, 쓴 만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해 하고, 그러는 나를 저도 또한 어려워한다. 서로에게 못할 것은 서로가 서로의 우상으로 건재함이다. 즉 하나님의 돌보심보다 앞서는 나의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아침에 일찍 교회로 올라가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한다. 말씀 묵상한 글을 되짚고, 어디 누구를 떠올리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책을 읽고 서성거리는 모든 혼자의 시간이 소중하다. 점심께 아내와 딸애가 나오고 함께 점심을 먹으러 오가는 동안에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날씨 탓에 어디는 아팠고, 쓸데없는 불안감은 저 혼자 요동을 부렸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슬그머니 약을 먹고 파스를 붙이고 안정제를 삼킨다. 다소 이와 같이 ‘혼자의 시간’을 강조하는 것은 여럿일 때 또는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할 때는 알 길이 없는 감사와 묵언의 깊이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어떻게 나와 함께 하시는가를 묵상할 수 있는 일은 소중하다. 내가 누구에게 당분간 어디 직장을 얻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권하였던 것도 그것이다. 적당히 돈도 있겠다, 굳이 그처럼 돈돈거리며 일을 찾아 나설 문제가 아니었는데도… 하긴 그 모든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이다. 딸애는 5월 한 달간의 휴직을 아주 곤욕스러워한다. 뭐 하지? 오늘은 뭘 할까? 하면서 주어진 혼자의 시간을 주체할 길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다. 대학 졸업하고 거의 병적으로 직장생활을 해온 터라, 늘 바쁘고 피곤했을 텐데… 주어진 혼자의 시간을 못 견뎌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들어앉는 경건의 시간, 묵언의 수행, 면벽수도나 어디 수도원 생활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모압이 아무리 흥왕하는 것 같고, 젊음이 언제나 이어질 것 같지만 인생이란 곧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나니,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사 16:10).” 이는 모든 모두에게 정하신 이치라. 주께서 우리를 세우시는 말씀에 기인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능히 주가 세우셔야 하는 일이라. 그러므로 우리 안에 믿음으로 구원을 세우신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복음은 국적이 없고 인종이 없고 교육의 차별이 없다.
은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우리로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하심인데, 비로소 온유하여진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그것은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진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아니면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주가 깨끗하게 하심에 따른 오늘의 수고는 혼자의 시간에서 얻을 수 있다. 하다못해 안 믿는 사람들도 돈 주고 명상원을 찾아 명상을 배우고 익혀 마음을 정화하겠다고 하는데 하물며 믿는 자로서의 혼자의 시간에 대하여, 나는 무료함을 억지로 참으라는 게 아니다. 분주하고 어지러웠던 삶에서 한 발 비켜서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명상이 아니라 주를 가만히 바라는 묵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주어진 삶에 충실한 것은 좋으나 그 충실의 노예로 살면 갑자기 혼자의 시간은 주체할 길이 없어, TV 앞에서 늘어진다. 다른 놀이가 없으면 무료함에 죽을 지경이다. 그러니 뭐라도 해야겠고, 클럽은 흥왕한다. 모압은 번창하고 애굽은 부강하다. 암몬은 즐겁고 블레셋은 활기차다. 이구동성으로 그게 다 사는 맛이라고들 읊조리는데, 그래봐야 그게 얼마나 갈까? 우리의 자유함은 거기에서 얻는 게 아니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러므로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2).” 우리가 주의 종된 삶으로 사는 것이 자유였다. 다들 자유함을 부르짖지만 돈에 얽매이고 일에 치이고 사람에게 부대끼며 아등바등 사느라 사는 데도 그 삶이 항상 고역이라. 절제가 없이는 사랑을 알 길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와 죄로부터의 해방에서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실은 우리가 얼마나 죄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았던가?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더는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
이 영광의 즐거움을 빼앗길 수 없고 더더욱 영원토록 만끽하기 위해서도,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부디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시 135:6).” 오늘의 말씀이 나의 영혼에 채워지기를. 이를 알면 알수록 더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7).”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9-20).” 그는 세세토록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이시라.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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