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송축하라

전봉석 2020. 5. 9. 06:28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이사야 15:1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1

 

 

모든 죄는 적극적이다. 일시적이며 소극적인 죄란 없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5:18).” 한두 번 그러다 마는 게 아니라 여러 번 덧대어져 의도적이며,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이를 합당하게 여겨 저마다 만족스러워한다. 자발적이며 참여적이다.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7:8-9).” 결코 그것은 부끄러워하지 않고(13), 나름 정당화하며(14), 스스로 설득력을 가졌으며(15-17), 횡재 같다(18-20). 그러한 죄의 속성은 학습된 것이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

 

그러한 우리를 위해 돕는 자로 삼으신 것이 이방민족들이다. 저들의 괴롭힘이다. “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87:4).” 저들은 우리로 복을 받게 하는 통로이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으로 되기까지 곁에는 애굽이 있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12:3).” 역으로 하나님은 저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기를 바라신다.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지대하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9:7).” 모든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20:4).”

 

엄연히 저들도 주가 지으신 바라.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10:5).” 애굽과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다마쿠스, 게달, 엘람, 갈대아 사람들뭇 저들 모두에게 보내신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1:5).” 이는 단지 특정하게도 예레미야에 대해서만 가지시는 계획이 아니다. 오늘 우리를 목사로 교사로 성도로 세우시는 까닭은 그러하다. 열방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모습을 바라신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21:24).” 그리하여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22:2).”

 

나에게 말씀이란 이정표다. 그때마다 먹는 알약 같다. 양식이다. 여러 번 표현한 것처럼 우연히 접하게 된 말씀 구절에서도 그날, 그 순간에 주께서 내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의미가 담겨 있다. 가령 이렇듯 열방에 대해, 만국에 대해 의아하게(?) 그 뜻을 음미하고 묵상하고 있을 때 고2 아이가 왔다. 코로나19 사태 후 언 두어 달 만이다. 간단히 근황을 묻고 잠언 8장을 두고 같이 읽고 나누었다. 전에 비해 한층 더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아이의 태도가 고마웠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되지만 모처럼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 같아 즐거웠다. 저 아이를 볼 때면 왜 스스로 보잘것없는 인생을 용인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두신 사랑이 귀하다. 모든 만국의 백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모두 그러하지 않겠나? 내가 다 건사할 수 없고 참견해서도 안 되고 책임질 수도 없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럼에도 나에게 그와 같은 사명을 두셨다. ‘지금 이러고 있는 게 다 무슨 소용이지?’ 하는 내 안의 의미는 하나님의 만국에 대한 계획을 다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한 민족이라.

 

오후 시간이 넘쳐나는 아이는 오전에 왔다가 여러 번 꿀렁거리며 요동을 친다. 성구를 써서 카톡 사진으로 보내고, 뜬금없이 사랑한다는 고백을 연발하고, 촘촘하게 자신의 앞날을 계획한 메모지를 찍어서 보내오고나는 그러한 아이의 몸부림은 불안이고 스트레스라는 것을 이제는 짐작한다. 그러니 어찌 할 수 있을까? 쉬는 날에도 같이 함께 하지 못하는 그 아이의 엄마나 형의 심정을 백 번 이해하면서도 답이 없는 노릇이다. 저 아이, 저들을 통해 그 가정에 한 영혼을 돌이키려 하심인데죄는 참으로 적극적이어서 그러지 못하게, 그럴 수 없는 저들을 에워싼다. 무관심으로 또는 외면함으로,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또는 지겨움으로그러니 저 한 영혼을 향하신 여호와의 계획하심은 감히 나의 짐작이나 상상으로 가늠할 길이 없다. 오죽하니 오전에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딸애가 조금은 이해가 되겠는지 아빠가 왜 속이 터져 하는지 알겠어!’ 하며 안쓰러워하였다. 이 말 하면 저 말 하고, 저 말 하면 이 말 하고, 그러니 못 알아듣는다고 수준을 낮추거나 무시하면 아이는 모멸감을 느끼는 것이고, 저 아이에게 나는 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

 

그게 분열증인지, 오랜 우리의 죄의 습성인지, 만성적인 주를 거역함인지 일일이 나는 열거할 수 없으나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 나는 이성애자여서 동성애자보다 나은가? 살인을 하지 않았으니 살인범보다 나은가? 나는 좀 하나님을 안 믿는 만국의 열국보다 그래도 좀 나은가? 복음은 그렇듯 고국이 없다! 특정인의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지엽적인 의미의 어느 민족, 특정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좀 나아서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는 특권을 누렸겠나?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죽는다! “전에 애굽 왕 바로가 올라와서 게셀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그 성읍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주었더니(왕상 9:16).” 솔로몬의 묘수가 그래서 옳았던가?

 

우리는 저마다 불확실성을 못 견뎌한다. 통계를 내고 자료를 검토하여, 분류하고 특정지어 확실성을 더한다. 하루 지난 프로야구 경기는 더 이상 누가 승리할지, 불확실성에서 벗어났다. 머리가 좋았던 솔로몬의 계책은 그리하여 이방 여인들과의 정략적인 결혼이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보다 자신의 확실한 판단을 선호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11:2).” 그러니 그 결과는 자명하였다.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3).” 성경은 불확실성을 강요한다.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이를 못 견뎌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애매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저가 더하시는 소망뿐이다. 소망이 없이는 믿음도 없다. 믿음과 소망으로 주의 사랑을 알고 그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산다.

 

믿음으로 우리는 자발적이 된다. 소망을 품고 덕을 이루며, 절망하다 용기를 내고, 타협하고 안주하려다 돌이켜 주를 바란다. 성경은 온통 암시와 표징과 은유와 묘사의 불확실성의 언어로 도배가 돼 있다. 하나님은 일을 숨기신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25:2).” 나는 우리 고2 아이가 왜 오는지 모르겠다. 단지 글쓰기 때문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다. 아픈 아이야 갈 데가 없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나름 온전한 아이로서 저 애를 내 곁에 두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 길이 없다. 오죽하니 딸애가 저만치 구석에서 우리 수업(?)을 듣다 속이 터질 것 같다고 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일일이 들어야 하고 같이 호응하며 그래도 다시 알려주어야 하며 가르치고 돌봐야 하는 가운데서 나는 힘에 부쳐 약을 먹으면서도 감당하려 한다. 나는 그럼 뭔가 확실한 결과를 알기 때문인가? 이 땅에서는 우리의 확신도 불확실성의 하나일 뿐이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으니까 믿는 것이지, 이미 믿고 말고 할 게 없는 확실한 결과를 두고 믿음을 다지지는 않는다. 가령 축구 경기가 끝나고 전후반 경기 종료 후에 그 결과를 알면서도 새삼 내가 응원하는 팀이 승리할 것을 믿음으로 응원하지는 않는 것과 같다. 그때는 이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나는 오늘 모압에 대한 경고를 들으며 오히려 주의 사랑에 확신을 건다.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15:1).” 엄밀하게 이와 같은 경고는 정작 저들을 향한 게 아니라 곁에서 듣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말씀이다. 에녹을 무드셀라에게서 세계 만민에 대한 심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경고로 들었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34:1).” 인생의 밤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힘에 부쳐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의 예시다. 그 밤에 우리는 주의 성전에 서 있어야 한다. 세상을 기웃거리고 어디 다른 '확실한 통계 자료'를 들고 그것으로 믿음을 걸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이미 믿음이 아니다.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11:10).” 솔로몬의 화려했던 지난날의 지혜가 이와 같이 덧없음을 확인시켜줄 따름이다.

 

여기서 우리의 참 지혜란,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134:2).” 오늘 시편의 약속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