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전봉석 2020. 5. 22. 07:07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이사야 28:5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시편 148:13-14

 

 

가끔은 하나님이 모호한 언어, 말씀으로 임하시는 것이 놀랍다. 보다 정확하고 더는 오해의 소지가 없이 수학으로 임하신다면 어떨까? 여러 해석과 논란의 여지없이 말이다. 오늘 이사야서를 읽으면서도 내내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28:5).” 하나님이 면류관이고 화관이 되어주신다. 더하여 영화로운 면류관이고 아름다운 화관이다. 이와 같은 은유는 그 해석과 의미가 분분하며 명확하지 못하다. 사실이 아니고 사실일 수도 없다. 그 의미에 내포하시는 주의 뜻을 읽어야 하는, 우리로 확장된 세계를 거닐 게 하신다.

 

시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148:13-14).” 백성의 뿔은 앞서 이사야서의 면류관과 화관을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언어의 세계는 다양하면서도 깊이를 더한다.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28:29).”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함부로 읽고 말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을 다양하게 언급한다. 저는 우리의 반석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8:2).” 요새이시다. 해양구조대이시고, 내가 그 안에 피할 바위시다. 방패이시며 구원의 뿔이고 나의 산성이시다. 이 한 구절의 묘사만으로 우리는 넉넉하여 묵상의 나래를 편다.

 

저는 사론의 수선화시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2:1).” 또한 용사이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15:3).” 목자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1).” 심지어 성자 하나님은 포도나무이고, 성부하나님은 농부이시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5:1).” 만일 이와 같은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이해한다면 온통 과도한 해석과 엉뚱한 우상을 수도 없이 섬겨대고 있어야 한다. 실제 그러하여서 풀도 나무도 모든 돌과 사물에도 하나님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우주의 기운과 바람의 결에서도 숨길을 찾는 종파도 있기는 하다. 그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이지만 모든 게 담을 수 없는 존재이다. 곧 이와 같이 ‘이다아니다사이를 모두 포함하는 언어가 은유다. 시에서는 이를 '시어'라 한다. 시적허용은 그래서 문법과 문자적해석과 언어의 상호작용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다시 오늘 이사야서를 좀 더 읽어보면, “나는 정의를 측량줄로 삼고 공의를 저울추로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너희가 사망과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스올과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28:17-18).” 여기서 넘쳐나는 은유의 세계는 풍요롭다. 은유란 이처럼 논리적, 문자적 사실 그 이상을 관통한다. 언어의 형식이 부과하는 모든 의미를 내포하고 부여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 가정예배 때 아들이 대표로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살게 해주세요.’ 하는 표현을 했다. 말씀으로밖에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길이 없다. 읽기보다는 듣기가 선행되고, 들음으로 믿음이 생겨나며, 듣기보다 자꾸 앞서려는 것이 우리의 말하기다. 자기 말을 먼저하려니까 듣지를 못하고 듣기를 나중으로 하다 보니 읽기가 더뎌진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40:6-7).” 우리는 들어야 하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라 말할까? 하나님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다.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란 모호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어서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이해다.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도, 인도하심과 지켜주심도 모두 그래서 더욱 개별적이다. 은유의 세계는 설명할 수 없다. 설명될 때 더는 확장을 멈춘다. 우리의 이해는 상식과 이성에 의존하려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에게 시어의 표현은 난해할 따름이다.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언어의 장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에게 성경의 언어는 난공불락 같다.

 

앞서도 생각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시고자 하셨다면 수학으로 하셨어야 한다. 수학은 모호한 언어의 세계가 아니다. ‘이다아니다가 명확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말씀으로 일하시고, 임하시면서 '이다'와 '아니다'를 모두 포용하며 망라하시는가? 어찌 언어의 모호성을 감수하시는 것일까? 말씀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 14).” 곧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우리에 대한 세심한 이해다. 우리의 관여와 참여를 이끄신다. 곧 언어의 방벽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우리 자신으로 임하시는 데 있어 가장 선한 의도와 방식으로, 우리로 우리에게 거하시는 방편이다. 이를 읽어라’ 하고, 읽을 수 있는 눈과 마음과 온 정성을 더하신다.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17:19).” 이를 또한 '먹어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10:9).”

 

나의 성경공부는 아이들과 개별적으로 성경을 읽는다. 무리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 아이에게는 이렇듯 저 아이에게는 저렇듯, 그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읽고, 설명하고, 함께 나누며 각자의 삶에 접목한다. ‘읽는다먹는다는 행위는 삶으로 산다는 의미다. 살아지지 않는 말씀은 그 의미가 언어로 가려진다. 사실 이와 같은 언어의 모호성을 우리 하나님은 감수하셨다. 우리를 긴장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서게 하신다. 어느 버튼을 누르면 불이 켜지고, 어떤 문을 열면 무슨 문이 열리듯 딱딱, 고정화된 언어가 아니다. 그때마다 다르다.’ 그래서 종종 성경에 대해 묻고 회의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이다'와 '아니다'를 무리하게 구분하려 든다. 그러다 그 놀라운 세계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로 받아들인다. 이 사람이 말하면 이렇고 저 사람이 말하면 저렇다는 식으로, 이를 모순이라 여기면 그 자체로 이미 성경의 언어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시편을 읽으면서 무슨 제품 설명서로 읽고 이해하려든다면 그 한계는 뻔하다. 성경을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의 지침서 정도로 알고, 자신에게 유익한 구절만 암송하고 찾아보며 위안을 삼으려 한다면 이는 그릇된 길로 가기 십상이다. 엄연한 것은, 은유를 문자적으로 다루려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 성경의 언어는 온통 은유적이다. 예수님도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 문자적으로는 은유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다. 이성의 논리로는 참과 거짓에서 거짓의 세계다. 옳지 않고 맞지 않다. 가령 시편 114편의 경우에서처럼 그 광활한 언어의 세계를 어찌 이성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3-4).” 이를 어찌 문자적으로 사실관계를 따질 셈인가? 과연 우리의 상식과 이해가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누구와 이야기하다 저의 자세가 은유를 읽을 마음이 아니라면 더는 성경을 나누지 않는다. 말해봐야 헛소리가 된다. 저에게는 십자가도 부활도, 예수가 포도나무시고 우리가 가지라는 것도 모두 허황될 뿐이다. 저의 세계는 그저 자신이 이해하는 ‘1+1=2’의 세계다. 과학이란 게 성경의 세계로 보면 코끼리 비스킷 같은 것이어서 그 발전과 발견과 발명에 인류가 놀라워하지만 성경의 세계를 조금만 은유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런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알 것이다. 우주에 은하계와 같은 행성이 몇 개가 있든! 성경은 요점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구원이란, 하고 단순명료하게 정의할 수 없다. 요점만 간단히 간략하게 하려다보면 그 의미는 튕겨나고 설득력은 사라진다. 완곡과 유비, 비유와 모험을 배경으로 하는 하나님의 세계는 제공될 수 없다. 은유는 정의할 수 없다. 하나님의 행동과 임재를 우리의 상식과 이해로 다 정돈할 수 없다. 은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연관성을 사방으로 뻗어간다. 해석을 확장하고 세계를 무궁무진하게 연결짓는다. 하나님의 세계는 그 이상의 곳? 무엇으로도 표현하여 담을 수 없는 시공간이다. 이를 오늘 말씀은 광대함으로 축약하고 있다.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28:29).”

 

그러므로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148:1).”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할렐루야뿐이다.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2-4).”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