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전봉석 2020. 5. 23. 07:17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13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149:5-6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은 곧 일상이 된다. 묵상은 참여다. 성경은 하나님을 드러낸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이를 묵상한다는 일은 불순종으로 잘려진 부분을 연결하고 이어 일치시키는 일상의 반복이다. 그러할 때 누구와 견주지 않고 경쟁하지 않는다.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저들의 수군거림에 휘둘리지 않는다. 즉 너무 애쓰지 않는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알아보지 못하며, 심지어 자신도 그러는 자신의 일상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주만 바라는 묵상으로 인함이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나는 내가 잘한다고 여기지 않지만 못한다고 탓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에 두신 이를 신뢰할 따름이다. 성경의 길을 걷는 것,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삶이란 그저 보고 즐기는 관상(觀賞)과 같다. 도제(徒弟)의 삶이기도 하다. 보고 배운 바대로 사는 일이다. 이를 일상(日常)으로 삼는 것이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운운할 때 너무 지나친 자기 열심이나 기준은 금물이다. 그러할 때 말씀을 묵상하는 일, 나에게 지금 이 시간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었으니 하나님의 세계를 통찰함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임재 속의 세계다. 행여 성경을 오늘 날의 신탁(神託)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자기 구절에 맞게 그것을 삶에 붙여 앞날을 내다보려드는, 또는 바라고 소원하는 따위의 행위는 예수님 오시기 500여 년 전에 그리스의 큐메에 사는 시빌이란 여선지자의 행위이기도 하였다. 구절 하나, 한 소절을 놓고 점괘를 보듯 사람들의 앞날을 예언했고 이는 그러다 마는 게 아니라 두고두고 이를 책으로 엮어 그 뒤를 따르는 도제들이 있었고, 여전히 적잖은 기독교인들도 동조하며 호응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즉 성경 구절 하나를 한 해의 운세로 보고 암송하거나 이를 일반화시키는 일 따위를 말한다.

 

묵상은 이러한 어리석음을 방지한다. 묵상은 말씀을 반추한다. 그 이야기의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고스란히 자신의 이야기로 들린다. ‘, 마치 내 이야기 같아!’ 하는 식의 반응은 자연스럽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기도다. 말씀 없이 기도는 가짜다. 기도 없는 말씀도 허상이다. 기도는 오로지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소용된다. 때론 탄식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26).” 또는 간구와 감사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3:16-17).” 하지만 그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62:1).”

 

모든 기도 언어는 하나님의 언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고 비로소 나의 영혼이 인격적인 관계로 주 앞에 서는 일이다. 하나님은 모호하기 그지없는 말을 사용하시는 위험을 감수하셨다. 그 가운데서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은유의 단어들을 자주 사용하셨다. 그래서 오늘에도 시빌과 같은 선지자(?) 혹은 대언자(?)를 자칭하거나 찾아다니는 경우가 있다. 성경공부를 그렇듯 여기기도 열심으로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기도는  더욱 더 개별적이고 가장 자기답다. 나와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이다. 그런 가운데 시편은 기도의 자유함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언제는 감사하고 찬송하다, 언제는 원망하고 탄식하다, 언제는 논쟁과 비난을 일삼다, 또 언제는 주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구한다. 시편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참 대화, 인격적인 수다, 기도의 세계를 가장 길게 서술해놓은 성경이다. 시편은 그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기도로 참여하게 하는 자리다. 따라서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어이 참여자가 된다. 오늘 시편은 그것을 우리는 관상한다고 언급한다.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149:5-6).” 그러나 우리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들렸다. 금욕과 은둔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지만 그와 다를 바 없는 일상으로 족하다. 어디들 모여 따로 구획하고 구별되게 자신들을 두는 일은 아니지만 그와 다를 바 없이, 운전을 하거나 식당일을 하거나 교사로 목사로 일상 가운데서 산다. 더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열을 올리지 않는다. 저들의 선호에 따라가지 않고 유행에 연연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판단이나 평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나서서 내가 무얼 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은둔 아닌 은둔이며 금욕 아닌 금욕의 삶이다. 우린 그래서 기도할 때 가장 우리답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이 있다.

 

묵상은 하루 이틀 하다마는 게 아니고, 하루 중 일부가 아닌 전부가 되었다. 우린 모두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5:6).” 그런데 이와 같은 결핍은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증폭시킨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그렇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찾아낼 것이다.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32:23).” 그러나 이미 우리의 죄는 바다에 던져졌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7:19).” 그러므로 더는 육체의 정욕에 이끌리지 않을 수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이는 곧 일상에서 사탄을 대적하는 일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4:7).” 마귀는 육체가 없다. 고로 생명도 없다. 그런 존재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그래서 종종 징계도 받는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12:6).”

 

아들애가 오고 글방은 글방다워졌다. 종일 녀석이 진지하게 공부하니 딸애도 휴직 기간인데 글방에 나와 공부하고, 오는 아이들도 공부를 하는 도서관 같다. 아들은 저녁에 다시 나가 새벽까지 공부하다 들어온다. 아침이면 교대를 하듯 내가 일찍 그 자리를 지킨다. 너무 조급하게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다가도 그 또한 그래보는 것이 나쁘지 않을 듯하여 모르는 척 둔다. 뜻을 세우고 목표를 가지고 공부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에 종노릇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어김없이 저녁에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고, 우리의 예배는 나에게 하루를 마치는 것이고 아들에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격이다. 이처럼 인격적인 관계에서 기도하기와 말씀읽기와 묵상은 습관처럼 우리의 몸에 밴다. 일상의 전부다. 나는 아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디 그 자세와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의 '관상'이 되기를 바란다. 주의 길을 가는 '도제'이길 기도한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훈련이다. ‘모든 성경은 우리를 향해서 말씀 하시는 것이면 시편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고 누가 말했다. 우리를 향해서위해서는 다른 것 같다. 시편은 우리의 일상이 기도인 것을 알게 한다. 주변의 모든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이를 가만히 묵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더한다.

 

주가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 아들의 걸음이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하시고 주 안에서 평안하기를 위해 기도한다. 세상 기준으로 잘 되고 성공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기를. 시편은 그렇듯 무엇이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친구가 새로 출판한 소설을 보내왔다. 열 몇 권째 되는 것으로, 한국문단에서는 이제 저의 입지가 탄탄해진 것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전에 가졌던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은 더 이상 없다. 그때마다 축하하면서도 부러워하고 시샘했던 것이 우습다. 더는 비교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아이는 유튜브를 제작하는 데 꽂혀 무슨 장비를 구입하느라 오지 않았다. 나는 새로 병원을 옮겨 고혈압약을 바꿨다가 종일 두통에 어지럼증으로 시달렸다. 이러쿵저러쿵 우리의 일상은 쉴 새 없이 번잡스럽다. 그럼에도 기도는 묵상 안에서 든든히 세워지고, 묵상은 말씀을 가까이 하며, 먹는 일로써 우리 영혼의 영양소가 된다. 오늘 날 이 허상의 나라에서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29:13).” 묵상과 기도와 말씀 읽기는 올곧은  영생의 삶으로 인도한다. 이는 모든 성들의 모임에서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149:1).”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다. 그 시작점은 가정이다. 가족은 예수의 지체가 되는 구심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5).”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은 세상 위에 있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6).”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7-9), 아멘.